나는 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PART 1. 살아있음. 5장 체험에 대하여

by 라이프퀘스트 한

5장 체험에 대하여


살아있음은 언제나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몸’에 주의를 두어 가만히 느껴보세요.

덩어리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는 존재감,

진동하고 있는 근원적 생명력을 곧장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각으로 들어가는 가장 확실한 통로입니다.


살아있음을 안다는 것은 머릿속의 개념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감각으로 확인되는 가장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살아있음은 책으로 배울 수 없고,

정교한 개념으로 정의될 수도 없으며,

타인의 화려한 수식어로 온전히 전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만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진실입니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설명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해는 머리에서 일어나지만,

살아있음은 몸의 감각과 지금 펼쳐진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자각으로 동시에 깨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스승들은 진리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체험으로 확인된다고 거듭 말해 왔습니다.


진리와 손가락 —
누군가 허공을 가리키듯 진리를 논하며, 죽비를 탁탁 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이거!”

그 순간, 대다수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소리가 나는 죽비와 탁자,
곧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만 시선을 빼앗깁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거!”가 가리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묻는 이들에게,

그들은 끝내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거나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할 뿐입니다.


정작 어떻게 체험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은 채,

개념으로만 설명하다가

공부를 오래 하다 보면 알게 될 거라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 버립니다.


그들 또한 몸을 통한 실재감을 분명히 확인하지 못했기에,

결국 똑같이 막연한 허공을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설명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입으로는 몸의 존재를 빌려 설명하면서도,
결론에 가서는 다시 모호한 “이거!” 하나로

모든 설명을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의 손가락이 가리킨 텅 빈 허공은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 선사들이 “이거!”라고 외친 것은,

“이거!” 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그 ‘작용’이

지금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리킨 것은 허공이 아니라

그 작용이 일어나는 ‘근원의 자리’였습니다.


겉보기에는 손가락이 허공을 향한 듯하지만,

실은 ‘지금 여기’에서 단 한순간도 떠난 적 없는 가장 선명한 실재,

즉 몸에서 묵직하게 확인되는 ‘덩어리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움직임의 근원이자, 당신을 지금 이 순간 살아있게 하는

묵직한 생명의 현장을 확인하라는 엄중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현장은 결코 아득한 허공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진동으로 느껴지는

이 생생한 덩어리감은

바로 이 몸에서 가장 먼저 확인됩니다.


묵직한 덩어리감으로 느껴지는 ‘있음’과,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는 ‘앎’,

그리고 앎이 스스로를 되비추어

‘있음으로써의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알아차리는 성질,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살아있음의 자각’입니다.


자각은 설명으로는 붙잡히지 않기에

역설로만 가리킬 수 있는 생생한 ‘이거!’입니다.

자각은 말이 아니라, 덩어리감으로 느껴지는

지금 여기서 확인되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리키며

“이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거!”라는 지시(指示)는

반드시 가리키는 대상이 있을 때만 성립합니다.


선사들이 죽비를 들며 “이거!”라고 한 것은,

죽비를 쥐고 있는 손의 감각과 몸의 작용,

그리고 그 밑바닥에 실재하는 ‘묵직한 덩어리감’,

즉 지금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진리를 막연하고 텅 빈

허공이라 여기곤 합니다.

많은 가르침이 비어 있는 상태에 머물라고 말하지만,

체험이 없으면

그 비어 있는 허공을 진리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진리는 설명되는 순간 허공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 보면 도무지 잡히지 않는 실재 대신,

그와 정말 유사해 보이는 허공을 진리라 믿으며

스스로를 설득해 버리기 쉽습니다.

실재의 생생함을 찾아 헤맬 용기 대신,

붙잡기 쉬운 허상을 진리로 삼아 안주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빠지기 쉬운 유혹이기도 합니다.


허공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동안에는

결코 몸이 증언하는 생생한 실재에 닿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체험은 실종된 채,

머릿속에 개념들과 방편만 켜켜이 쌓아 올릴 뿐입니다.


관념의 허공에 주의를 빼앗기는 한,

몸이 뿜어내는 생생한 실재감은 영원히 남의 이야기가 됩니다.

지식은 늘어날지언정 ‘지금 여기’를 닿는 법을 잃어버린 채,

개념이 만든 미로 속에서 공허하게 겉돌 뿐입니다.


이제 정교한 설명의 짐을 내려놓고

오직 몸의 증언에만 집중해 보겠습니다.

알고 보면 당신이 그토록 매달렸던 그 ‘허공’조차

자각이라는 무대 위에 잠시 나타난 대상에 불과합니다.


텅 빈 공간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이 대체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묵직한 존재감으로 맥동하는

‘근원적 생명’이 지금 몸으로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묵직한 바탕 위에서 자각의 빛이 비치기에,

우리는 ‘비어 있음’조차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주해야 할 것은 바깥의 허공이 아니라,

그 허공을 알아차리는 내면의 살아있음입니다.

당신이 몸으로 살아있지 않다면

어떤 말도, 깨달음의 외침도,

자각의 표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바라보아야 할 것은

관념으로 붙잡은 허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몸의 감각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는 살아있음 그 자체입니다.


나 또한 그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한때 진리가 허공처럼 느껴졌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 듯했지만,

삶은 따뜻해지지 않았습니다.

‘허공’을 논할수록 실재하는

‘살아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진리는 가리켜 보여줄 수 있는 허공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맥박 치는 ‘몸’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직접 만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대상화된 허공은 관념 속에 머물지만,

몸을 통해 흐르는 살아있음은

자각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선명한 실제로 맥동합니다.


이제 ‘이거’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내려놓고,

가장 가까운 자리, 가장 정직한 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름뿐인 ‘이거’가 아니라 몸이 증언하는

묵직한 덩어리감을 지금 여기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설명과 체험의 차이

설명과 체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불꽃 그림과 불

불꽃을 그린 그림은 아무리 정교해도 뜨겁지 않습니다.

“뜨겁다”는 완벽한 설명은 곁들일 수 있어도,

진짜 열기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실제 불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 보아야만

비로소 뜨거움이라는 실재를 압니다.


물의 설명과 마심

“이 물은 아주 시원해”라는 백 마디 말은

결코 갈증을 해소하지 못합니다.

컵에 담긴 물을 실제로 입에 대고 한 모금 들이켜야만

시원함이라는 진실을 압니다.


햇살의 정의와 체감

햇살을 과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시린 겨울 공기 속에서 피부 깊숙이 스며드는 온기만큼은

어떤 문장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생명, 또한

몸에서 묵직한 덩어리감으로 먼저 드러납니다.

설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뜨거움과 시원함, 따스함처럼
자각을 통해 직접적인 체험 속에서 확인되는 실재입니다.


모든 찰나는 살아있음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생생한 장면들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덩어리감의 체험은 특별한 황홀경이나

늘 기분 좋은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함과 답답함, 두려움이 밀려올 때조차

그 요동치는 감정 밑바닥에 변함없이 버티고 있는

묵직한 ‘존재의 무게’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살아있음은 자각의 찰나에
밀도 높은 진동처럼 온몸을 관통합니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곧 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다.”


이 웅장한 고백을 마주하는 순간,

당신을 괴롭히던 외로움과 불안은 더 이상 당신을 붙잡지 못합니다.

살아있음의 자각은 언제든 돌아와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집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이해하려는 생각'이 그 울림 위에 끊임없이 소음을

덧씌우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과거와 미래를 헤매는 동안,

전신을 흐르는 가장 생생한 느낌들을 지나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오랜 가르침 역시 이를 강조해 왔습니다.

진리는 알음알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몸이라는 정직한 현장에서 직접 체험되어야 하며,

지금 여기서 느껴지는 생생한 실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명은 목적지를 가리키는 이정표일 뿐,

체험 없는 지식은 실체 없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직접 발을 내딛는 체험이 없으면,

진리는 다시 관념 속으로 미끄러지기 쉽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 즉 살아있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몸과 호흡 속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피어났다 사라지는 감각과 느낌으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살아있음은 어떤 특별한 경지나 환상적인 순간에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일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고요한 찰나에 불쑥 다가옵니다.


복잡한 생각과 날 선 판단이 옅어지는 틈이 생길 때,

그 여백의 침묵 속에서 살아 있는 몸을 느껴보세요.

살아있음은 늘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체험은 언어라는 그릇에 다 담기지 않지만,

그 어떤 지식보다 깊고 명징한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살아있다.

이 묵직한 존재감 속에서 몸은 이미 진실을 증언하고 있다.”


생각의 감옥에 갇혀 있던 삶이,

근원적 생명과 몸 위에 다시 서서,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삶의 주권을 되찾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삶은 더 이상 억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스스로 펼쳐내는 살아있음 그 자체가 됩니다.


이제 ‘생각하는 나’를 내려놓고,

‘존재하는 몸’, ‘살아있는 생명’으로 돌아가 봅시다.


발바닥이 지면을 지탱하는 묵직한 느낌,

찰나마다 이어지는 가슴의 미세한 울림,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서늘하고 따스함을 따라가 보세요.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을 한 번 알아차려 보세요.


관념을 내려놓고 ‘있음’의 감각과 ‘앎’을 동시에 마주해 봅시다.

지금 가슴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곳에는 묵직하게 박동하는 감각의 일렁임이 있고,

동시에 그 일렁임을 바로 아는 명료한 앎이 있습니다.

지금 이 몸에서는 ‘있음’을 느끼는 감각과
그것을 아는 앎이 함께 드러납니다.

이처럼 앎과 느낌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살아있음의 실체를 직접 확인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이기에,

오히려 생각의 그물로는 붙잡히지 않습니다.

이해하려 애쓸수록 멀어지고,

직접 몸으로 느낄수록 가까워집니다.


살아있음은 몸을 통해 드러나며, 몸에서 체험되고,

그 체험을 통해 스스로를 압니다.

체험이 깊어질수록 살아있음의 뿌리도 깊어집니다.

비로소 우리는 생각과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고요히 바라보는 자리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참된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며,

마침내 그와 온전히 동행하는 일입니다.


저 또한 생생한 살아있음을 만나기 전에는

묵직한 존재감을 전혀 몰랐으며,
그저 지금의 생각과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피곤함이나 컨디션의 기복, 감정의 좋고 나쁨은 느꼈지만,
그것이 ‘살아있음’이라는

거대한 바탕 위에서 일어나는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가끔 평온함을 느낄 때도

그저 스쳐 가는 기분 정도로만 여겼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음은 단 한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진정한 나’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자각’이 깨어나자,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살아있음은 언제나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있었고,

나는 생명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각이란

늘 있던 것을 다시 알아차리는 일에 불과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절박하게 묻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리는 보이지 않는 고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 고개를 숙여 몸통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실재는 애써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 있음을 문득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각의 시작이자 통로의 입구는

바로 지금 당신의 몸이 증언하는 묵직한 ‘덩어리감’입니다.

이 당연하고도 선명한 감각 속에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살아있음의 모든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 묵직한 실감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체험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는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관문인
‘몸을 통한 자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몸은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닙니다.

살아있음이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가장 신비한 통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