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PART 1. 살아있음. 6장 몸을 통한 자각

by 라이프퀘스트 한

6장 몸을 통한 자각


몸이 근원적 생명이 형상으로 드러난 걸작이라면,

진리는 책장 속에 잠든 문자가 아니라

지금 이 몸에서 맥동하는 실재로 확인되어야 마땅합니다.

머릿속의 복잡한 지도를 내려놓고,

지금 느껴지는 묵직한 덩어리감에 주의를 두어 보십시오.

그 감각이 바로 당신을 본질로 인도할 가장 확실한 통로입니다.


관념의 구름 너머에 있는 신비가 아니라,

지금 당신의 피부와 근육,

그리고 묵직한 존재의 밀도 안에

이미 진리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배가 고플 때 '배고픔'이라는 단어를

백 번 공부한다고 배가 부르지 않듯,

자각 역시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근원적 생명은 지금 이 순간 발바닥이 지면을 누르는 압력,

가슴속의 은은한 박동,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온기,

그리고 몸 전체를 채우는 묵직한 덩어리감 같은

가장 정직한 물리적 신호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만약 이 생생한 실감을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살아있음’이라는 눈부신 실재를 만나는 대신,

그저 ‘살아있다’라는 메마른 개념의 사진첩만

뒤적거리고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놓고 나 몰라라 내버려 둘 수 없듯,

당신을 숨 쉬게 하는 근원적 생명 또한

감각이라는 분명한 실체로 곁에 머물며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찾을 때 부모가 언제든 응답하듯,

실재하는 생명이 실재하는 감각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


그 필연적인 증거가

바로 지금 이 몸이 뿜어내는 묵직한 ‘덩어리감’입니다.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그동안 스쳐 지나왔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피부가 우리 몸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닿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 내면의 접촉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을 느껴보세요.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려 애쓰기보다,

들숨에 따라 부드럽게 팽창하는 가슴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세요.

이제 감각의 범위를 넓혀 온몸을 느껴봅니다.

전신에 퍼져 있는 미세한 진동, 은은한 온기,

바닥을 누르는 몸의 무게감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호흡의 흐름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정직한 신호입니다.


주의를 몸으로 돌리는 순간,

오직 감각으로만 확인되는 근원적 생명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몸으로 직접 대면하는 첫걸음입니다.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대단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그러함으로 존재해 온 진실을 다시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살아있음은 언제나 ‘지금’에서만 유효합니다.
어제의 몸을 느낄 수는 없고,

내일의 호흡을 당겨 올 수도 없습니다.
몸의 감각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만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지금’이 가장 정직하게 흐르는 자리입니다.


한때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늘 알아차려야 한다.”


그 문장이 내려앉은 후,

오랫동안 하나의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나는 한동안 이 물음을 화두처럼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하고 속으로 외치며

펼쳐진 공간을 인식하는 찰나, 뜻밖의 마주침이 일어났습니다.

펼쳐진 공간을 인식하자마자,

공간 속에 놓여 있던 몸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몸을 느끼려 애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펼쳐진 공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려 했을 뿐이었습니다.

공간이 열리니 그 안에 있던 몸이 저절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간이라는 배경을 인식하는 그 즉시,

몸이라는 실재가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상태.

나는 이 마주침을 ‘동시 인식’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숨이 자연스럽게 고요해졌고

어떤 생각도 끼어들 수 없는 여백이 열렸습니다.

이름 붙일 수 없었지만,

무언가 분명한 실재가 전신에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자각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공간을 인식하는 동시에 몸이 드러나자,

어렴풋했던 실재는 비로소 묵직한 실감으로 변했습니다.


생각이 빚어낸 환상은 순식간에 흩어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온몸에 덩어리감으로 채우는

생생한 ‘생명’만이 남았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생각으로 지금을 아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실재하는 몸의 덩어리감을

느끼는 순간이 곧 ‘지금’이었습니다.


그리고 펼쳐진 공간과 몸을 동시 인식하는 것은,

덩어리감이 억지 없이 선명히 드러나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지금’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추상적인 시간을 생각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온전히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덩어리감을 인식하는 그 순간이

바로 살아있음과 마주하는 순간이며,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로 지금’이었습니다.


이제 저에게 ‘지금’은 째깍거리는 시계의 틈새가 아닙니다.
그것은 몸의 덩어리감으로 꽉 채워진, 흔들림 없는 실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승들이 말하던 ‘있음’의 실체였습니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묵직한 존재감으로 찾아온 확신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안개는 걷히고 모든 것이 선명해졌습니다.

수많은 자각의 가르침이 왜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았는지,

그리고 방황하던 내가

왜 끝내 묵직한 ‘몸’을 자각의 통로로 삼을 수밖에 없었는지—

왜 자각의 통로가 몸이라는 실재의 대지로 이어져야만 하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이제 하나씩 짚어보려 합니다.


그 시작으로, 어떤 화려한 형이상학적 논리도

단칼에 끊어내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무엇으로 현실에 살아 있습니까?”


머리로 답을 찾기 전에,

몸이 먼저 내놓는 묵직한 대답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허상입니다”라고 답한다면,

그 말은 이미 한 가지를 드러냅니다.

그런 말조차 살아있다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답한다면 다시 물어보십시오.

“그것을 지금,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이때 당신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렇게 움직이고, 느끼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하지만 그것은 살아있음이 밖으로 드러난 ‘활동’ 일뿐,
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기반은 아닙니다.

움직임과 말하기는 모두 지금 이 현실에 실재하는

몸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질문은 다시 하나로 돌아옵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으로 현실에서 살아 있습니까?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몸입니다.


움직임이 멈추고 입이 닫힌 잠든 밤에도,
당신의 몸은 여전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기능을 멈췄을 때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 실재하는 물리적인 몸입니다.

그리고 그 몸이야말로

현실에서 살아있음을 가장 정직하게 확인하게 해주는 자리입니다.


비유하자면, 컴퓨터 게임에서

캐릭터 없이 게임을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세계 안에 나를 대신해 들어가는 형상이 없다면,
게임이라는 경험 자체가 아예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각은 허공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황을 멈추고,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묵직한 덩어리감,
즉 ‘몸’이라는 가장 가까운 실재로 귀환하는 사건입니다.


많은 이들이 깨달음(자각)을 찾아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며

수천 권의 책을 읽습니다.

그들은 “나는 몸과 생각이 아니다”,

“나는 텅 빈 의식이다”라는 말을

정교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지금 몸에서 살아있는 실재로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삶을 바꾸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정작 자신의 몸 안에서 요동치는 생생한 생명,

그 묵직한 ‘덩어리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이 아는 99%는 삶 앞에서 0%의 실재와 같습니다.

실재의 1% 한 조각이 빠진 이해는,

결국 머물러 기댈 곳이 없는 말일뿐입니다.


100도가 되어야 끓는 물처럼,

실재의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지식은 아무리 화려해도

결코 존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1%의 실재를 결여한 지식은 지도만 쥐고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우기는 허망한 착각일 뿐입니다.


덩어리감은 단순히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것은 주체에게 직접 닿는 유일한 통로이며,

모든 관념을 ‘진실’로 바꾸어놓는 열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단순한 진실을 놓치고 살까요?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간섭이

감각으로 느껴지는 실재에 언제나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의지만으로 멈춰 세울 수 없습니다.

“멈춰!”라고 명령하는 목소리조차
이미 생각의 언어 안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가르침이 “그저 알아차려라. 깨어 있어라.”라고 말하지만

정작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길은

머리로 생각을 멈추는 인위적인 기술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몸을 통해 ‘살아있음’이라는 실재를

직접 체험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제 깨달음(자각)의 내용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앎(Awareness)’은 본질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를 비추는 ‘시선’ 일뿐,

진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앎이라는 빛이 아무리 밝아도,

그 빛이 머물 자리가 없다면 관념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빛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자리가

바로 생명이 있음으로 드러난 ‘몸’입니다.
이 사실을 대면할 때,

관념의 빛은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의 온기로 변합니다.


있음(Existence)은 태양입니다.

즉 생명이 물리적 세계에 스스로를 드러낸,

묵직한 덩어리감으로 느껴지는 실체가 바로 몸입니다.


앎(Awareness)은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입니다.

몸을 떠난 앎은 곧 관념입니다.

태양이라는 거대한 질량(몸의 밀도)이

전제되지 않은 빛(앎)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앎은 애써 얻어내는 성취가 아닙니다.

살아있음의 덩어리감이 선명해질 때,

앎은 빛처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본연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세상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경험됩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느끼는 몸의 감각들이,

바깥의 세계를 당신 안으로 들여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비유했듯이, 당신은 하나의 태양과 같습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세상은

그 빛이 비친 장면처럼 당신 앞에 펼쳐집니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빛이 비추는 대상만 바라보며 진리를 말하고,

정작 그 빛이 머무는 근원인 태양 -

곧 몸 안에 살아 있는 묵직한 실재를 놓친다는 데 있습니다.


빛만 붙잡으면 말은 화려해질지 몰라도,

그 빛이 어디에서 뿜어져 나오는지 모르면

결국 개념의 안갯속을 헤매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바깥을 더 보는 일이 아니라,

시선을 거두어 당신의 태양인 ‘덩어리감’을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온몸을 채우는 묵직한 덩어리감을 자각하는 순간,

빛은 차가운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실재의 온기가 됩니다.

그때 당신은 비로소 세상을 비추는 빛의 주인이자,

빛이 머무는 든든한 자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사실, 저 역시 몸이 증언하는 실재는 늘 곁에 있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오랫동안 막연했습니다.
하지만 이 원고를 쓰며 그 막연한 감각에

‘덩어리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저 또한 그 정체를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내면의 실재를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언어를 찾는 일은,

그 자체로 깊은 성찰이자 자각의 여정이었습니다.

마침내 길어 올린 ‘덩어리감’이라는 표현은

나의 경험과 이해가 하나로 맞물리는 지점이었으며,
이제는 혼란 속에서도 실재를 붙잡게 해주는

가장 정직한 자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처음 ‘나=생각’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은 분명 첫 번째 자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모든 것이 텅 비어 보이는

해방감 속에 머물러 있었을 뿐,

자각이 삶을 지탱하며 실재로 내려앉는 자리,

곧 자각의 바탕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덩어리감은 그때도 내 안에 있었겠지만,

그것이 살아있음을 관념이 아닌 실재로 만드는

토대인 줄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문’

즉, 공간과 몸을 동시에 인식하는 그 순간을 통과하며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살아있음의 실체가 다름 아닌 몸의 생생한 덩어리감,

즉 ‘있음’이 확인된다는 것을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곧 생명의 자리-덩어리감으로

즉각 돌아오는 일임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자각과 귀환 사이에는 순서도 틈도 없었습니다.

덩어리감을 느끼는 순간, 곧 본질이었습니다.


이제는 나도 모르게 생각에 깊이 빠졌다가도

‘아, 지금 또 생각 속에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주의를 몸으로 가져오기만 하면

생각은 즉시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도 점점 더 짧아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살아있음의 자각을 놓치지 않은 채로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음이구나.”


그제야 비로소 수많은 스승이 강조했던

‘깨어 있어라’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깨어 있음이란

단순히 생각이 멈춘 상태가 아닙니다.

폭풍 같은 생각 속에서도

그 뿌리인 생명의 덩어리감을 놓치지 않는 상태,

즉 파도(생각)를 보면서도 동시에

바다(실재)의 깊이를 느끼는 ‘자각’을 의미합니다.


자각이 깊어질수록 한 가지 사실이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두 번의 큰 깨어남처럼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생각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나는 생각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존재의 전환이었고,

또 하나는 관념의 방황을 끝내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실재의 자리를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 둘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덩어리감’이라는 통로에 들어서는 순간,

안과 밖의 경계는 무너지고

오직 ‘살아있음’이라는

거대한 진실만이 온전히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실재로 수렴하는 필연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생각의 중얼거림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돌던 자리에서

살아있음의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며,

‘나는 생각이 아니다’를 깨닫는 것은

돌아온 자리에서 살아있음이

생각을 객체로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자각의 양면이었습니다.


자각이 머리의 이해에만 머물면

다시 ‘생각’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가장 확실한 확인의 자리인 ‘몸’으로 돌아옵니다.


자각은 ‘새로운 나’를 얻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몸은 진리가 삶으로 나오는 문이며,

삶이 진리를 들여다보는 창입니다.


우리가 자각을 실제로 경험하고 확인하는 일은

결국 몸을 통해 일어납니다.

머리로 자각을 논하는 것은

맛을 보지 않고 음식을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있는 자각은 언제나

지금 여기, 몸이라는 생생한 현장에서 확인됩니다.


바람과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피부와 호흡으로 느낄 수 있듯,

살아있음 또한 형체는 없으나

몸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덩어리감으로 실재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떤 가르침은 때때로

자각을 몸과 무관한 초월 상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몸을 벗어던져야 할 껍데기나 하찮은 대상으로 치부하며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자각이 몸을 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왜 살아있음은 굳이

고통과 관계가 뒤섞인 세상 속에

몸이라는 문을 열고 자신을 드러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살아있음이 몸을 통과할 때만,

자각은 관념의 때를 벗고

‘살아 있는 진리’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감정이 여전히 긴장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예전과 똑같이 반응하고, 판단하고,

무언가를 붙잡게 됩니다.

자각이 아직 ‘머리의 지식’에 머문다면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자각을 직접 체험한 사람은 다릅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예전처럼 쉽게 휘말리지 않습니다.

그는 살아있음을 자각할 때 느꼈던 근원적 생명의 덩어리감을

몸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을 비난할 때

즉각적으로 반박하거나 방어막을 치는 대신,

먼저 몸을 인식하며 자각으로 깨어납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박동과 퍼지는 울림,

그리고 온몸을 채우고 있는 덩어리감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이 자각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의 반사’가 아니라,

살아있음을 자각한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선택되는 침묵입니다.


체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고단한 훈련이나 억척스러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몸으로 확인한 뒤 일어나는 존재의 전환입니다.


그 이후의 삶은 더 이상 에고의 결핍을 채우려

억척스럽게 애쓰는 삶이 아니라,

살아있음이 나라는 통로를 통해

스스로를 살아내는 삶으로 기울어집니다.


“살아있음의 덩어리감으로 몸을 느껴보세요.”

그때 비로소 물질을 넘어선 생명의 실재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어 “몸의 덩어리감을 느끼며 자각해 보세요.”,


이 두 표현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몸의 감각을 느끼면서 자각이 시작됩니다.

묵직한 ‘덩어리감’을 자각의 통로로 삼아,

실재의 안쪽으로 접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자각이 분명해지면 내가 몸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이 몸을 통해 자신을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몸을 느끼는 별개의 ‘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이 이 몸을 통해 스스로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몸을 통한 자각이 일상의 흐름처럼 익숙해지면

시선은 바깥을 향하고 있어도,

주의는 저절로 살아있음을 향합니다.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납니다.


그렇게 생각과 감정이 잠잠해진 자리마다

평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평온은 우리의 존재 방식을 바꾸고,

살아있음에 대한 신뢰를 낳습니다.


신뢰는 내맡김으로 이어지고,

내맡김은 마침내 우리를 자유로 이끕니다.

자유란 모든 가능성에 향해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때 살아있음은 열린 문을 통해,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일상의 기적을 펼쳐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흐름을 한 문장으로 묶어두겠습니다.


결국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여기에서 몸으로 드러나 ‘있음(Existence)’이고,

그 있음을 스스로 아는 앎(Awareness)’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답입니다.


몸이라는 닻을 잃은 앎은 삶의 파도에 휩쓸리지만,

자신의 덩어리감을 태양처럼 확인한 자의 앎은

결코 꺼지지 않는 빛이 되어 온 세상을 비춥니다.


이제 제가 자각하는 한 순간을 묘사해 보겠습니다.

살아있음이 자신을 느끼는 순간을 함께 느껴 보시면 좋겠습니다.


펼쳐진 공간을 단번에 인식하는 순간,

시야가 열리며 들숨이 저절로 깊게 들어옵니다.
그 숨이 찰나에 멈칫하며 고요해지는 순간,

가슴에 압력이 차오르듯 몸의 덩어리감이 묵직하게 드러납니다.

이 밀도 높은 실재감은 이내 온몸으로 퍼져나갑니다.

(이것은 순차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공간이라는 배경을 인식하자마자,

몸이라는 형체가 생명의 묵직한 실재감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자각으로 들어갈 때, 나도 모르게 숨이 한 번 크게 들이마셔지고 저절로 멈춰집니다.

몸은 여전히 따뜻하고, 맥박은 뛰며, 주의는 오히려 또렷합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하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숨은 잠시 멈췄지만, 살아있음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다시 자연스럽게 호흡이 이어질 때,

몸의 경계가 바깥 공간으로 부드럽게 확장되는 듯 느껴집니다.

몸을 둘러싼 공간과 몸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생명력으로 채워집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호흡하는 나'가 아니라,

몸과 공간 전체를 통해

살아있음이 스스로를 호흡하고 있음을 압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통과해 온 체험의 기록입니다.
사람마다 열리는 방식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으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이 문을 지나며

몸과 공간을 통해 자각이 열리는 자리를 확인했습니다.
그 끝에서 만난 것은 관념이 아닌, 살아있음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당신의 몸으로 그것을 직접 확인해 볼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