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똑서 Dec 15. 2018

엄마, 그럼 나 태권도할래

 신문에서 중동 아시아의 여성인권에 대한 기사를 보고 울분을 차서 딸에게 침을 튀기며 말했다.

"딸, 너는 커서 페미니스트가 되어라. 어떤 나라의 여자는 눈만 빼고 다 가려야 하고, 외출할 때도 꼭 남자랑 같이 가야 하고, 남자 한 명이 여자 4명과 결혼한다. 여자는 운전도 할 수 없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수도 없다. 어떤 나라에서는 여자는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노예 취급당한다. 우리나라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받는 일이 많다. 너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성인권 향상을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어라. “

“엄마, 페미니스트가 뭐야?”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기회도 얻고, 대우받을 수 있도록 운동하는 사람들이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을 듣던 딸이 말했다.

"엄마, 그럼 나 태권도 운동할래"

"어??"

갑자기 어리둥절했다. 

‘운동이 그 운동이 아닌데…’ 

딸이 알아들을 수 있게 내가 설명하지 못했구나. 7살 딸이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아직 이해하기는 어렵구나. 나중에 딸이 조금 더 크면 이야기해줘야겠다.

이 에피소드를 친한 직장동료에게 이야기했더니, “맞네. 아직 어리니까 페미니스트는 힘이 세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네”라고 말했다. 막연하게 딸이 아는 게 부족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딸의 눈높이에서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페미니즘은 사회 제도 및 관념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당하는 여성에 대해 저항하고 성평등을 이루자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원초적인 페미니즘의 발생원인은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인 차이로 인한 것이다. 7살 딸은 페미니즘의 발생 원인을 제대로 파악했던 거였다. (역시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석하기 나름이다.) 태생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약하다. 

몇 년 전에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이너프>라는 영화를 봤다. 제니퍼 로페즈는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아내다. 제니퍼 로페즈는 남편으로부터 자신과 사랑하는 딸을 지키기 위해 격투기 기술을 배운다. 마지막에 남편과 맨주먹으로 맞짱을 뜬다. 아주 통쾌하게 쌍코피 나게 남편을 흡씬 두들겨 패준다. 물론 힘으로 남자를 제압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나는 때리는 남편에게는 힘으로 대적할 수밖에 없다는 아주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은 영화로 기억한다. 나약했던 여자가 싸움의 기술을 배우면 남자도 이길 수 있다. 결론이 웃기지만, 여자도 힘을 쓸 수 있다는 거다. ‘여자가 힘으로 남자를 제압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약하다’라는 고정관념을 깨야한다. 엄마가 된 이후 나도 모르는 힘이 솟아날 때가 있다. 아이가 탄 유모차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기도 하고, 한 손에는 무거운 가방을, 한 손에는 아이를 안을 때도 있다. 근육도 쓰면 쓸수록 발달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오래전에 유명 연예인이 전남편에게 야구방망이로 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사건으로 사무실에서 한창 토론이 벌어졌다. 나이 든 남자 팀장님이 "그 여자 세게 생겼잖아. 그래서 한마디도 안 지고 말대꾸하다가 맞았을 거야"라고 말했다. 결혼한 여자 직장선배도 "맞아, 그 여자가 너무 셌어"라며 맞장구쳤다. 그때 그 말이 너무 충격이라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기가 세면,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하면 그게 맞을 이유가 되는 건가? 보통 센 여자는 남자들이 싫어한다고 한다. 남자들의 말을 고분고분 순종적으로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이 있는 여자라면 이런 남자는 재활용 불가능하게 폐품처리해야 한다. 하물며 같은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럴 때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는 건가?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었다면 골프채나 부지깽이라도 집어 들어서 같이 싸워야 한다. 육체적으로 감당이 안 되면 <이너프>의 제니퍼 로페즈처럼 싸움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친한 언니와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 쌓인 수다를 풀었다. 그때 아주 사소하지만 깊게 각인된 이야기가 있다. 빌라에 사는 언니는 4층까지 쌀 20kg짜리 2부대를 옮겼다고 한다. 그걸 어떻게 옮겼냐고 하니까 등에다 짊어지고 2번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언니, 남편은 없었어요? 그걸 어떻게 혼자 옮겼어요?”하고 묻자 몸무게 47kg인 언니가 보무도 당당하게 말했다. “약한 척하지 마. 여자도 다 할 수 있어” 언니는 그때 남편이 없었지만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언니를 만난 후 나도 약한 척하지 말자라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했는데, 정수기에 생수가 하나도 없지 뭔가. 생수통은 20kg, 언니가 등에 진 쌀부대와 같은 무게였다. 남자 직원을 부를까 고민하다가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몇 번 낑낑거리다가 성공했다. 처음이라 힘들었지만 계속하니까 요령이 생겨서 잘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 여자만 커피 심부름을 한다고 투덜대기 전에 남자가 드는 무거운 짐을 하나 옮기는 게 어떨까? 동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남자가 하는 일도 여자가 하고, 남자도 여자가 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딸이 유치원에서 장래희망을 쓴 작은 용지를 가져왔다. A4용지를 4 분등한 종이에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그린 그림과 짧은 글을 있었다. 선생님이 예쁘게 코팅도 해주고 고리도 달아주었다. 딸은 장래희망을 “약해빠진 사람들을 도와주는 페미니스트.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거예요. 내가 닮고 싶은 위인 세종대왕. 백성과 신하를 평등하게 대한 세종대왕처럼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페미니스트가 될 거예요”라고 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딸은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엄마의 말 한마디로 꿈이 페미니스트로 바뀌었나 보다. 물론 페미니스트라는 뜻을 정확하게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하는 말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페미니스트로 여성의 인권을 울부짖으면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 텐데…. 딸이 커서 자라는 세상은 어떨지 몰라도 내가 자라온 세상은 페미니스트의 감성을 지닌 사람에게는 힘든 세상이었다. 여성 인권, 남녀평등을 큰 목소리로 주장하지 않더라도 그런 생각을 비치면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그런 82년생 여자의 삶이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그냥 서글프다. 국민학생 시절부터 짝의 장난 이상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고, 학원에서는 마음에도 없던 남학생의 접근으로 공포에 떨어야 했고 직장에서는 남성들에 비해 적은 기회와 많은 성적 희롱을 당해야만 했다. 김지영이라는 30대 여성이 겪고 있는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나는 남자 직원들과 똑같은 시험을 보고 입사를 했지만 남자와 여자는 아침의 일상부터 달랐다. 여자 신입은 출근하자마자 설거지를 해야 했다. 대부분 일회용 컵을 쓰지만, 내빈 접대용 커피잔과 커피를 젓는 숟가락과 숟가락을 담는 컵은 일회용이 아니라서 설거지가 필요했다. 손님이 오면 차 대접할 사람으로 이름이 불리는 것도 여자고, 또 내가 커피를 타야 하나 가슴에 찔리는 것도 여자다. 남자들은 무거운 물건을 옮기고 야근도 여자보다 더 많이 한다고 말한다. 그까짓 커피 타는 거쯤이야 뭐가 힘드냐고 구박한다. 그까짓 커피 타는 일로 전락한 그 하찮은 일, 힘도 들지도 않는 그런 사소한 일을 왜 여자만 해야 하는 걸까? 그러자 누군가 말한다. “여자가 타주는 커피가 제 맛이라고”


불행하게도 결혼하면 남녀불평등은 더 심해진다. 남자와 결혼하면 남자 집에서는 며느리 역할(?)을 강요한다. 과연 그 며느리 역할이 무엇일까? 남자를 낳아준 부모님에게 무조건 잘하는 것이다. 반면에 결혼한 남자는 사위의 역할을 강요당하나? 장인, 장모는 사위에게 무조건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 옛날부터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했다.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손님인 사위는 그만큼 어려운 사람이었다. 세월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며느리만큼 사위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야 밥벌이를 남자가 하고 살림도 남자 집에서 하니까 여자는 미안한 마음에 남편과 시댁에 ‘나 죽었소’하고 지냈지만, 지금에야 그러나? 그런데도 아직까지 옛날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 때문에 여자는 여전히 가사와 육아에 독박을 쓴다. 아이는 같이 낳았는데 기르는 것은 여자 혼자만의 몫이 되어 버리고, 남자는 단지 도와주는 입장이 된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서 은유는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라고 했다. 어느 관계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전 세계의 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이 있다. 그 이름도 황금률이다. 얼마나 대단하면 황금이라는 표현까지 했을까? 황금률은 바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이다. 시부모님이 며느리에게 대접받고 싶으면 며느리에게 잘해주면 된다. 사람은 부채(debt)의 감정을 느낄 때 비로소 갚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친구는 다음 세상에는 남자로 태어날 거라고 한다. 술도 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이 친구는 아이가 태어나자 육아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남편이 술 약속 때문에 도망치듯 나가 버리고 나면, 아이는 온전히 친구의 몫이 된다. 육아를 도와주는 입장인 남자와 여자는 평등할 수 없는 남녀 사이가 된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깍두기 국물에 대한 재미있는 인식이 나온다.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이미 그것을 알았다. 밥상에는 깍두기를 먹는 사람과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할이든 윤리든 취향이든 그냥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깍두기 국물에 대한 정희진 작가의 눈이 참 신선하고 부러웠다. 밥상에 올라온 깍두기 반찬, 깍두기를 다 먹고 나면 국물이 남는다. 이때 이 국물을 먹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엄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본 딸이다. 먹다 남은 국물, 버리기 아까운 국물,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은 바로 여자다. 화려한 밥상 뒤에는 그 음식을 만든 여자가 있고, 다 먹고 남은 식탁에는 설거지해야 할 여자가 있다. 


아이를 낳고 몇 달 후에 산후조리원 엄마들끼리 모였다. 다들 육아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가사의 부담은 여전했다. 그러다가 내 밥 챙겨 먹기도 힘든 지금, 제일 맛있는 밥은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이라고 입 모아 말했다. 그러자 다른 엄마가 “라면도 남이 끓어준 라면이 제일 맛있다”라고 덧붙였다. 다들 수긍했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밥”을 책임져야 할 존재가 된다.

누가 뭐래도 아직도 여성은 약자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의식을 가진 여성들이 많아져야 한다. 여성들이 스스로 페미니즘에 눈을 떠서 자신들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센 여성의 활동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엄마가 되고, 그런 엄마가 딸과 아들을 키워야 한다. 특히 아들을 둔 엄마는 더더욱 아들 교육에 신경 써야 한다. 아들을 키울 때 ‘남자니까 괜찮아’라는 선입견을 엄마가 막아야 한다. 어린 아들에게 “남자니까 길거리에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싸도 괜찮아, 남자니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도 괜찮아.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 관계를 가질 때도 남자니까 괜찮아”라는 생각의 싹을 잘라야 한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달라지면 아들도 달라진다.

또한 딸을 키울 때 ‘여자니까 안 돼’라는 고정관념도 없애야 한다. “여자니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서는 안 돼, 여자니까 몸을 함부로 굴리면 안 돼, 여자니까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해야 돼. 여자니까 나대면 안 돼”라는 말도 없애야 한다. 페미니즘을 이해한 엄마가 아이를 키우면 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 인간으로, 똑같은 행동을 하면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엄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이전 10화 기다릴 줄 알아야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