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죄책감에서 나를 적응 시키다
지난주, 그리도 기다리던 막둥이 솔이의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 있었다. 사실 기다리던 건, 약 4개월 전 베이비시터를 구하기 전이다. 그녀가 오고 나서는 그다지 솔이의 어린이집에 대한 니즈가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긴 대기 끝에 9월 학기 어린이집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사실 적응 기간이 오기 며칠 전부터 미안함과 죄책감 같은 게 컸고 또 준비물은 왜 이렇게 많은지… 아침에 큰 애들 두 명 학교 보내는 것도 정신없는데 아기 솔이까지 준비해서 어린이집에 데려다준다는 게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적응 기간은 3일로 주 양육자가 아침 9시 반부터 3시 반까지 내내 함께 한다. 두 아이들 때는 잠시 1시간, 길어봤자 2시간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서 이렇게 6시간 풀 타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3일간 나는 알게 되었다. 어린이집 하루 내내 일과를 3일간 함께하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솔이가 몇 시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어린이들을 대하는 자세, 몬테소리 교육방침도 배웠다. 나는 애 셋 엄마라 내가 제일 많이 알 거라는 착각을 하고 갔는데 가보니 내가 제일 모르는 것 같았다. 같은 반 올리비아, 오로라의 엄마는 첫째 엄마들이라 그만큼 관심을 더 쏟는 때이고 그녀들이 좀 침착한 스타일이라서 그런지(내가 본 북부 이탈리아인들은 대부분 침착해 보인다) 정신없는 세 아이 엄마는 그녀들에게 많이 배웠다. 아마도 내가 이탈리아 어린이집이나 이곳 스타일 육아에 익숙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많이 알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좀 궁금한 게 많기도 했다. 아이들이 아침에 뭘 먹는지, 어떻게 자는지.. 등등 근데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남의 집 애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한’ 한국인 엄마의 모습일까? 아니면 새로운 나라에서의 새로운 방식에 궁금한 것일까? 둘 다인 것 같다.
사실 우리 솔이가 그 반에서 제일 어리긴 했다. 어려봤자 몇 개월 차이다. 모두 2023년생이다. 그러나 두 돌전 아기들은 한 달 차이가 어마어마하기에 4월생, 2월생 아이들과 솔이는 아주 큰 차이가 나 보였다. 솔이가 적응 첫날에 너무 사무치게 울어서 자책을 많이 했다. ‘내가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자유를 왜 그렇게 빨리 원해서 이제 돌이 된 아기를 힘들게 하나. 난 이기적인 엄마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걱정과 생각을 어린이집 선생님과 올리비아와 오로라 엄마들에게도 토로하기도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그렇다 치고 올리비아 엄마와 오로라 엄마는 날 보고 위로는 했으나 그다지 거들 지도 않았다. 그 뜻은 그녀들은 그다지 미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보다 4-6개월 정도 더 집에서 끼고 있어서 그랬을까? 아이 하나 있는 엄마들이 오히려 애 셋의 막내를 보내는 나를 더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렇게 쓰고 나니 이 문장들에 다시금 눈이 간다.
“내가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자유를 왜 그렇게 빨리 원해서”
“어린 아기를 이런 나의 니즈로써 희생시키나”
다시금 읽어볼수록 건강하지 못한 발언이다. 나는 내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이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수입이 크건 작건 자신의 일은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사람 자신에게 말이다! 자유를 원하는 건 어느 인간이든 원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엄마는 모든 욕구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10개월 동안 아기를 품고 1년을 정성껏 키웠다. 나에게 이런 죄책감을 갖게 해주는 것은 나에게 씌워진 ‘완벽한 엄마’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아기는 엄마가 키워야 하고 세 살까지는 데리고 있어야 하며,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 말 못 하는 아기를 기관에 보내면 안 된다… 등 크게 눈에 크게 띄지 않게 여기저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모두의 상황은 다르다. 아이도 다르고 엄마도 다르다.
나는 나를 낮게 얕잡아보며 아기를 데리고 양육하는 것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며 죄책감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3일간 있어보니 적응이 필요한 건 아기가 아니라 나였던 것 같다.
솔이는 이틀째부터 확연히 편안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첫날은 아기들과의 상호작용을 몰라 좀 거친 모습 (인형을 던진다든지 다들 있는데 가운데에 철퍼덕 앉아서 아이들을 불편하게 한다든지)을 보였으나 하루 만에 사회화가 된 건지 조금은 그들의 space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아니면, 단순히 다른게 더 재밌었을 수도 있도. 구경하는 게 즐거운 나이다. explorer라고 불린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들을 이렇게 불렀다. Sol the Explorer!
다른 친구들이 솔이를 챙기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감동이었다. 아직도 빨대컵을 마시는 솔이를 보며 ‘Sol’s aqua’ 솔이의 물~ 하면서 솔이가 던지고 다니는 물통을 갖다주고 어떤 아이는 입에도 대게 해줬다. 솔이가 늦으면 Dove Sol? 솔 어딨어? 묻기도 했다고 했다.
셋째 날은 선생님의 개입이 더 컸다. 나는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선생님한테도 자연스레 가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기저귀를 갈 때는 미친 듯이 움직이는데 선생님이 노래 부르며 갈아주니 누워서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두 돌도 안 된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포크와 수저로 너무나도 능숙하게 먹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솔이가 그동안 의자에서 난리 쳤던 것은, 할 일이 없이 수동적으로 떠먹여주는 음식만 먹었던 게 지겨웠 것이 아닐까 했다. 3일 적응 기간을 끝내고 솔이에게 바로 수저와 포크를 주었다. 아주 허술하게지만 자신이 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그런 동작을 하며 의자에 훨씬 더 오래 있었다.
선생님 말씀이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식사를 먹다 보면 자신감이 생기고 그 자신감들로써 어떠한 음식을 볼 때 ‘나도 저거 먹을 수 있어! 맛있겠다!’ 생각하며 그 일상 활동으로부터 가진 자신감을 토대로 다른 것에 도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솔이에게 혼자 해 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가 바빠서, 흘리는 걸 닦고 다시 다 먹이느니 내가 떠 먹이는 것을 택했던 것이다. 이게 더 쉬우므로.
이건 어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떠먹여주는 것.
내 손 까딱 안 하고 떠먹여지는 것.
그러나 진짜로 도움을 주고 싶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도와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고 그 옆에서 그들을 진심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을. 솔이에게 포크질을 시켰고 잘 안되면 솔이의 손이 더 잘 집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내가 먹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먹는 것을 도왔다. 그렇게 솔이는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10월 2일차, 어제는 수저와 포크로 먹으라고 하니 식판을 그대로 전체로 던져 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3일간 엄마들에게 질문지가 제공되었다.
질문 중에서는 하루를 관찰하는 질문이 있었다. 아기들이 잘 때 엄마들은 작은 의자에 앉아서 그것에 답을 썼다. 다들 엄청 열심히 썼다. 나는 영어로 쓰고 아래에 파파고로 돌려서 이탈리아어로 썼다. 내일은 어떨 거라 기대하느냐? 이런 질문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3일간의 경험으로 당신이 집에 가져갈만한 배움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답을 썼다. (여기에는 약간 더 살을 붙여 쓴다)
“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기회를 제공하면 아이들은 자기 손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서 지켜봐 주면 아이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낸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하는 모습, 그것을 지켜보는 선생님과 부모님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참 좋았다. 3일간 어린이집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다 보고 이름도 알게 되었다. 몇 시쯤엔 우리 아기가 이렇게 하고 있겠구나- 이런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집에 오면 더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내가 더 잘 쉬고 일하고 아이를 맞이하고 싶다.”
매번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도 자꾸 부족한 나 자신만 보는 현상이다. 이번 기회에 나는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된 지금, 이제야 조금 적응된 느낌이다.
브레네 브라운의 ‘마음 가면’책에서 나온 문장을 다시 한번 기록해 본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부족하다는 관점보다는 충분하다는 관점에서 부모 노릇을 하자.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가치들을 직접 실천하자
대담하게 세상에 뛰어들자. 과거의 우리보다 더 대담해지자
우리가 걸치고 있는 갑옷을 의식하자. 갑옷을 벗고 취약해지고 진짜 모습을 드러내면서 아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자.
오늘도 나는 부족한 엄마라는 말보단 ‘충분한 엄마’라고 말하고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