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지'로 퉁치는 삶
1.
이제 나도 중년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이로 접어들면서 이전에 하지 않았던 생각들이 가끔 고개를 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행동(또는 생각)을 하는 것 보면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따위의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 아침 추석연휴를 앞두고 방 정리를 하며 든 생각은 '나도 꽤 마음이 너그러워졌네'
2.
마음이 너그러워졌기 때문에 나이가 든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이다. 뭐 이런 철학적인 이야기는 잠시 다른 곳에 치워두고, 그냥 말 그대로 나도 꽤 마음이 너그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냐.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기나긴 연휴를 앞두고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정말 이상적으로 계획을 잘, 그리고 정말 많이 설정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이 변경하는 사람이었다. 내 인생을 위한 대시보드(예컨대 몇 년도에 연봉을 얼마 달성할 것이다, 그를 위해 필요한 자격요건 및 준비는 이렇게 만들어가야 한다 등...)를 파일형태로 만들고 하나씩 지워가는 것에 성취를 느꼈을 정도로 계획을 세우고 달성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괜한 곳에 힘을 썼던 것 같다. 물론,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 지금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맞다. 하지만 뒤돌아 그때의 나를 보면 사서 고생을 한 정도를 아득히 넘어 멍청하게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았던 것 같다.
3.
너그러워진 이유는,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중순까지 "인생은 정말 제멋대로 가는구나"라는 것을 실전을 통해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하는 것마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예상했던 것과 그대로 가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일도 힘들고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내 일상도 괴로웠으며, 가장 컨트롤하기 어렵다는 사람관계는 내 마음의 병만 더 키워 병원에 갈 지경이 되었다. 사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잘 살아가는 이들이 많기에,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적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차저차 잘 살아남았다. 몸은 비록 결국 여러 군데 칼을 대 버린 걸레짝이 되어 버렸지만.
4.
지금의 나는 거창한 계획도 세우지 않고, 뭔가 쫓기듯이 증명해야겠다는 다짐도 하지 않는다. 가끔 이렇게 벌어 노후에 나와 우리 가족들 어떻게 먹여 살리나 하는 고민은 들지만, 그래도 이전만큼 강박적으로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다. 다들 뭐 잘살겠지. 내가 안 해줘도 다 살아왔던 사람들인데.
갑자기 이렇게 변한 것은 아니고 인생의 모진 풍파를 정면으로 받다 보니 하나씩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놓게 되더라. 내가 힘들어서 놓았든, 풍파가 강제로 손에 들려 있던 것을 가져갔든, 내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들은 한계가 있더라. 그렇게 그냥 남들 다 아는 '나 또한 거대한 세상 속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한 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다 보니 점차 바뀌었다. 바뀔 수 밖에 없었다.
5.
작년과 확실히 달라진 한 가지는 내 마음속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정말 확실하게 박힌 것이다.
'사기당할 수도 있지'
'노력해도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지'
'내가 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지'
'노력해도 개선할 수 없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지'
'내가 생각보다 그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
뭐 기타 등등. 대상을 나로 한정하지 않고 타인으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일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세상 속, 더 복잡한 인간군상 안에 살아가고 있기에 절대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범죄 등이 아닌 이상 '그럴 수 있지'로 퉁쳐버리게 된달까.
6.
'나이가 들수록 너그러워진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닐까.
'그럴 수 있지', '뭐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기는 것.
그 대상이 나 자신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지인이든, 설사 그것이 세상일지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너그러움인 것 같다. 조금 차갑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냥 모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더 나아가 별로 관심이 없어지기 때문에 너그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직장 선배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둘 다 이전보다 뾰족함이 사라졌는데, 그 이유를 나는 이전 경험에서 찾았고, 그 선배는 노화에서 찾았다. 무슨 말이냐면, 그냥 늙어서 힘이 없어져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머리 아프게 싸우며 살고 싶지도 않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이 속 편하다나. 듣고 보니 또 그 말도 맞는 듯하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또 너그러워짐이라는 단어의 진의가 무엇이 되었든... 나이 먹어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로 인해 나 자신과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를 이전보다는 조금 더 친근하게 대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흘러가는 물처럼, 지형에 따라 높이에 따라 모양과 속도가 달라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너도 나도 모두 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