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짧다고 느껴질 때. 다른 말로 하면 저 멀리 목적지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은, 그러한 선 위에 서 있다 보면 점차 떠남이 낯설어진다. 내 살 길 찾고자 정신없이 달릴 적에는 내 주위에 사람이 떠나든, 물질이 떠나든, 꿈이 떠나든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내가 지금 당장 가야 할 길이 급하기에 후다닥 달리기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손에 잡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줄만한 여유. 어찌 보면 미련 없음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이 생기고 나서는 주위를 조금씩 조금씩 돌아보게 된다.
2.
결혼식 보다 장례식을 더 많이 가게 되는 나이에 접어들며, '죽음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모두가 치열하게 달리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뿐인 할머니를 보낼 때를 지나고 갑작스레 병을 얻어 먼저 간 지인들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던 순간들도 지나며, 아등바등하며 잡으려 했던 나의 목표들이 부질없음을 차근차근 깨달아 가는 동안 어느샌가 내가 아저씨라 부르던 나이가 되어 버렸다. 나이가 들면 더 성숙하고, 완숙해질 줄 알았던 내 모습은 오히려 더 철부지 같다. 결정을 함에 있어 과감함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떠남이 점차 더 낯설어진다.
3.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떠남이라는 단어 하나로 뭉게 버렸지만, 그 의미를 어찌 한 줄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하게 나를 이 세상에 두고 떠나가는 주변인들의 떠남. 때로는 나의 의지로 매몰차게 가버릴 수 밖에 없는 떠남.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 둘 곳 하나 없는 쓸쓸함만 남겨두고 떠난 시간들.
어쩌면, 내가 낯설게 느껴는 것은 수많은 떠남 뒤에 남겨진 나의 외로움일 수도 있겠다.
4.
많은 이들이 젊었을 때 더 과감한 도전을 한다. 젊을 때 가지고 있는 그 빛나는 혈기와 열정으로 인함이겠지만, 나만 두고 바라보면 그건 '실패경험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무모한 계획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도전했던 경험들이 쌓이며, 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었다. '이것도 안되면 큰일 나', '그때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었지', '다시는 그러한 감정 느끼고 싶지 않아' 등 실패 경험이 쌓이며 도전을 망설이게 되었다. 의사결정을 위해 저울에 달아야 할 추(錘)가 '나 하나'에서 다수의 사람으로 늘어나며 어찌할지 모르는 상황은 더욱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얻는 것보다 잃게 될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더 커진 것이다. 수동적, 능동적, 자의, 타의.. 이런 수식어들을 다 차치하고 내 울타리에서 떠나는 그들의 순간이 낯선 것이다.
5.
중학생 시절, 가정 선생님의 정년퇴직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가정 선생님은 마지막 말씀을 하시기 전 자신의 마음을 시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며 주섬주섬 품에서 두어 번 접힌 종이를 꺼내 읽으셨다.
"오랜 시간 나무에 앉아 이쁘게 지저귀던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아있던 나무는 마치 그 새를 그리워하듯 세차게 흔들립니다. 돌아오라고, 다시 내 곁에 오라고 외치듯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흔들리던 나뭇가지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그 떨림이 멈추고, 마치 그 누구도 앉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러다 봄이 오면 싹을 띄우고 꽃을 피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로운 계절을 맞이합니다."
선생님의 연사는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아직까지 기억하는 내용은 이뿐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그 분과 동년배의 선생님들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셔서 일까. 아니면 만남과 떠남의 덧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선생님의 나뭇가지와 새 이야기는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으로 남아있다.
6.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을 만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과정들을 넘어 초연한 모습이다. 모든 것이 바람과 같이 왔다 흘러가듯이, 나 또한 바람에 실려 홀연히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 나도 그렇게 되고 싶지만, 사실 노력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떠남은 익숙하지 않다. 해가 거듭될수록, 내가 떠나는 것도 떠남을 보는 것도 점점 더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막을 수 없는 이 시간들이 지나면, 나 또한 가정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둥근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난 아직도 이 세상에 욕심이 참 많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