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느낀다는 것

무용치료와 사탕

by 코코넛소녀

이제 내 차례였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처음으로 제 감정을 마주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제가 쓴 추천서가 수정된 채로 제출된 일이 있었어요. 팀장님이 저한테 말도 없이 그렇게 하셨더라고요. 작성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문서를 봤을 때 정말 화가 났어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억울해할수록 저만 손해라는 생각에 그 기분을 빨리 넘기려고만 했는데, 오늘 매트 위에서 그날 일을 떠올리면서 감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봤어요. 그랬더니 서운함이랑, 무시받고 싶지 않았던 마음, 나를 인정해주길 바랐던 마음이 보이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문제는 빨리 풀고 지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느끼는 게 아니라, 정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순간 목이 메었지만 계속 말했다.


“오늘은 그 매듭을 풀려고 애쓰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감정에게 거기 있어도 된다고 허락해 준 것 같아요. 답답했고 불편했지만,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냥 느끼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자리를 뜨는데 나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나는 이 경험으로 내 일상이 달라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괜히 물병 뚜껑을 한 번 더 여닫고 시간을 끌었다가 선생님과 속도를 맞춰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선생님! 혹시 괜찮으시면,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럼요.”

우리는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니, 수업 중 오갔던 감정들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수업에서 느낀 게 정말 신선했어요. 앞으로 계속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해보신 걸 일상에서 계속 연습하시면 돼요.
막연할 때는 감정이 몸의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떠올려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화가 날 때는 ‘지금 이 화가 몸의 어디에서 느껴지지?’하고요. 그렇게 하면 감정과 거리를 두고 감정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죠.”


“그렇게 감정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좀 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까요?”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에 조금씩 다가갔다.

네. 감정은 언제나 오연님께 무언가를 말해주려고 하고 있어요. 그걸 알아차리고 나면, 오연님이 진짜 바라는 모습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될 거예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이렇게 제 감정을 들여다보려고 한 건 회사 일 때문만은 아니에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렸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느껴요. 특히 남편이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엄하게 대할 때요. 제가 그걸 말리면, 저희끼리 다툼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아요.


남편은 자기 나름의 방식이 있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런 태도가 아이한테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돼요. 그동안 이 일로 많이 싸웠어요. 그래서 이제는 제 감정을 말하고 싶어도 싸움으로 끝날까 봐 주저하게 돼요.”

내 얘기를 듣는 그녀의 표정은 그게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남편에게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아까 한 말과 비슷한 맥락인데요.. 감정을 표현하기 전에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오연님 스스로 그 감정을 잘 알아야 해요.


오연님이 자신의 감정을 잘 이해하면, 남편에게도 더 정확히 전할 수 있어요. 그렇게 전해진 말은 갈등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돼요.”

이어 선생님은 더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연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건, 삶을 바꾸고 싶다는 용기가 있다는 뜻이에요. 그 용기가 없다면, 이런 말 자체를 꺼내지 못했을 거예요.”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느낌이었다.

“오늘 보여주신 용기 때문에 저도 도와드리고 싶어요. 자신을 돌아보고 바꾸고 싶다는 마음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감사해요. 사실 저도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웠어요. 근데 말하고 나니까 훨씬 나아졌어요.”

선생님이 웃으며 가방에서 작은 캔디통을 꺼내 내게 건넸다.


캔디통 상단의 투명 플라스틱 뚜껑을 톡 하고 들어 올리자, 아래쪽에서 가느다란 슬라이드형 트레이가 스르륵 밀려 나왔다.

그 안엔 색색깔의 사탕들이 한 줄로 가지런히, 무지갯빛처럼 꽂혀 있었다.


나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건 제가 하와이에서 사 온 캔디예요. 오연님을 돕고 싶은 마음에 드리는 선물이에요. 어떤 감정이 올라왔을 때, 이걸 하나 먹어보세요.”

“와 감정 조절에 효과가 있는 사탕인가요?”

이건 감정을 잠시 바라볼 시간을 주는 도구예요. 이걸 먹을 땐 반드시 ‘지금 나는 어떤 기분이지?’라는 문장을 떠올려야 해요.

그리고 사탕을 녹이면서 그 감정을 천천히 느껴보는 거예요. 맛을 느끼듯, 감정도 느끼는 거죠.”

나는 사탕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단맛은 언제나 옳으니까요."


내 말에 우리는 같이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건 용기예요.’
선생님의 그 말이 귀에 맴돌았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군가 나조차 몰라줬던 내 모습을 알아봐 준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깊은 위로였다.


그리고 나는,

용기 있는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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