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치료와 사탕
“이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볼까요?”
세 번에 걸친 무용치료 시간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우리 손에는 어느새 선생님이 건넨 색색깔의 마스킹 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은 각자 원하는 공간으로 이동해 테이프를 뜯어 붙이며 마음속 공간을 표현해 보라고 했다. 우리는 바닥에 선을 긋듯 테이프를 붙여 각자 자신만의 공간을 그려 나갔다. 나는 커다란 침대와 책상을 제일 먼저 만들었고, 책상 위에는 모니터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올려두었다. 침대 옆으로는 햇살이 가득 들어올 수 있는 창문을 그렸고, 한쪽에는 아이들이 와서 함께 놀 수 있는 작은 공간도 마련했다.
테이프로 만든 단출한 공간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들로만 채워져서 그런지 금세 애정이 생겼다.
“이제 자신이 만든 공간에서 잠시 쉬어 보세요.”
나는 내가 테이프로 만든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요가에서는 마지막에 송장 자세를 취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움직임들은 이 자세를 위한 거예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을 두드렸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자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동작을 잘하는 것보다, 온전히 다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건강한 사람이에요. 우리는 늘 바쁘게 움직이지만, 사실 쉬는 게 더 어렵습니다. 쉬는 건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어요. 스스로 내려놓아야 하거든요.”
눈을 감으니 낯설지만 아늑한 고요가 퍼져왔다. 내려놓으니 오히려 내가 붙잡고 있던 마음이 보였다.
지금 누워 있는 곳이 안전한 내 공간이라고 믿어지는 그 순간, 불현듯 꺼내기 두려운 물음이 떠올랐다.
‘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을까? 아니면 현지가 무언가 잘하는 모습일 때만 마음이 놓이는 걸까? 혹시... 나는... 현지가 완벽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얼마 전 숲 체험에서 다른 아이들과 달리 간식만 찾고, 탑 쌓기가 잘 안 되자 몇 번 시도하다 돌아앉아 버린 현지를 보고 가슴이 답답했고, 어린이집 선생님으로부터 다른 친구들에 비해 의존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불안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아이들을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하지만 정작 내 삶 속에서 과정에 대한 칭찬은 부족한 결과에 대한 위로처럼만 느껴졌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과정 자체도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얼마 전, 선생님이 건넨 사탕을 입에 넣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알게 되었다. 내 안에는 ‘완벽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프게도 깨달았다. 나는 그 믿음을,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던 내 아이에게도 요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제야 장면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요즘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동우가 “안머~”, “물 줘” 하고 짧은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나와 남편, 그리고 친정엄마는 그 옆에서 말없이 "어머, 귀여워라", "이런 말도 하네" 하고 탄성을 지르곤 했다. 그 옆에서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던 현지. 그 무표정한 얼굴이 불현듯 마음에 걸렸다.
며칠 전 엄마가 전해준 이야기도 떠올랐다. “현지가 ‘할머니는 왜 이렇게 동우랑 친해요?’ 하고 묻더라.”
어린 동우는 할머니와 늘 붙어 지내며 자연스레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현지의 그 물음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다. 놓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서운함, 그 마음의 표현이었다.
생각해 보니 얼마 전 현지가 내게 했던 질문에도 같은 불안이 숨어 있었다.
“나중에 동우는 다른 어린이집 가면 안 돼?”
그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동우가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면, 엄마와 아빠, 할머니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까지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요즘 현지가 대답을 짧게 하고, 사소한 일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하며 자꾸 아기처럼 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불안했다. 의존적이고 적극적이지 못한 그 모습들이, 혹시 내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현지는 그저 동우처럼 주목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제야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현지가 보낸 수많은 신호들을 나는 불편한 문제 행동으로만 치부해왔다는 사실을.
내가 던졌어야 할 질문은 ‘우리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가 아니라
‘현지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였어야 한다는 것을.
눈시울이 서서히 뜨거워졌다. 아이가 보낸 신호를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 미안하고 가슴이 저려왔다.
“괜찮아요. 우리가 멈추고 돌아보는 순간부터 새로운 길이 열리니까요.”
선생님의 말은 우연히도 내 정곡을 찌르며 다가왔다. 그 목소리가 마치 오래된 위로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천천히 짐을 챙기며 나가려는데, 강의실엔 나와 선생님만 남아 있었다. 무용 치료가 끝났다는 사실이 아쉽게 다가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이곳에서 스스로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선생님이 주신 사탕 덕분에 제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제가 제 마음을 얼마나 외면하고 살아왔는지 알게 됐어요. 예전에는 불편한 감정이 찾아오면 얼른 떨쳐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억지로 없애지 않아도, 그냥 그 자리에 두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완벽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어요. 그동안은 그 믿음이 제 안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지내왔던 거예요. 선생님이 제게 이런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셨으니, 앞으로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숨에 내뱉고 나니, 말이 조금 길었나 싶어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소감을 발표하는 학생처럼 주절주절 떠든 건 아닐까 싶어, 급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쑥스럽게 눈치를 보는 내 모습에,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은 뒤 의자 옆에 놓인 가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잠시 가방 속을 더듬다가, 이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제가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이에요. 무용 치료는 여기서 끝나지만, 이 책이 오연 씨에게 새로운 길잡이가 되어 줄 거예요.”
선생님이 내게 책을 내밀었다. 선생님의 손끝은 단순히 책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내게 힘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함께 전하는 듯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책의 표지에는 빽빽한 숲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사람에게 이정표처럼 다가오는 이미지였다.
나는 두 손으로 책을 받아 들었다.
“선생님, 꼭 읽어볼게요. 선생님이 알려주신 것들, 잊지 않을게요.”
책을 품에 안으니 마음이 묵직하게 울렸다.
이 책 안에,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한 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