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차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 상담실. 선생님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오연님, 잘 지내셨어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네, 그런데 이번 주는 좀... 힘들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학습지 회사를 통해서 아이와 관련된 검사를 하게 됐어요. 인성 검사랑 학습 검사였는데, 아이 학습 능력이 많이 떨어지게 나왔더라고요.."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성 검사에서는 여러 항목 중에 준법성이 가장 낮게 나왔는데, 그분이 설명해 주시면서 그러더라고요.
그게 '아빠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항목'이라고. 현지가 아빠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 있대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 터지는 것 같았다.
"그분은 심리 검사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동안 남편이 현지한테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애한테 뭔가를 시켰는데 한 번에 안 하면 '너 사랑받기 싫구나?'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있어요. 별생각 없이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저는 그 말이 너무 싫었어요. 아이가 그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선생님은 조용히 내 말을 들으며 물으셨다.
"그럴 때 오연 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제가 끼어들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잖아'라고. 근데 남편은 제가 훈육을 방해한다고 해요. 남편은 훈육을 통해 현지가 실수를 줄이길 바라는 것 같고, 저는 현지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데..."
나는 말을 이었다.
"남편은 제가 늘 아이를 감싸고 돌기만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게 아니라, 너무 강하게 말할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는 건데."
"혹시 그 검사 결과는 남편분과 공유하셨나요?"
"네. 근데 남편은 '검사가 신뢰할 만하냐'라고 반문하더라고요."
그 말을 하며 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의 대화는 마치 피곤한 말장난 같았다. 내가 근거를 대면 그는 그 근거의 신뢰성을 의심했고, 내가 직관을 이야기하면 그건 나의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라며 무시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누가 더 맞는지를 겨루는 토론 같아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편 때문에 아이가 불안해하고 위축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네... 저는 그렇게 느껴요. 현지가 너무 눈치를 보고, 뭔가 확신 없이 행동하는 게 느껴져요."
선생님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연님, 아이들은 부모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고 그대로 배워요. 부모가 불안해하면 아이도 불안해지고, 부모가 침착하면 아이도 안정감을 느끼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는 남편이 현지를 혼낼 때, 불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남편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야?'라고 하게 돼요."
"네,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아이가 훈육을 받을 때 부모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아이는 혼나는 것보다 더 큰 불안을 느낄 수 있어요. '내가 잘못해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거구나'라고 해석할 가능성이 크거든요."
나는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현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남편이 훈육을 하는 순간에 느끼는 불안감을 바로 남편에게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필요한 감정을 소화해서 전달해 주는 게 더 효과적이에요."
"어떤 식으로요?"
"예를 들어, 남편이 큰 소리로 현지를 혼내는 상황에서 오연님이 '너무 심하게 하지 마'라고 하면, 아이는 '아, 아빠가 나를 혼내는 게 정말 큰일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대신, 아이에게 '방금 놀랐겠구나. 하지만 엄마는 괜찮아'라고 말해주면, 아이는 '이 상황이 그렇게까지 위험한 건 아니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되죠."
나는 눈을 깜빡이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제가 남편을 제지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괜찮아, 이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어'라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거네요?"
"맞아요. 부모가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도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정리하는 법을 배워요. 아이가 불안을 느낄 때 부모가 차분하게 감정을 소화해서 표현해 주면, 아이도 감정을 더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게 되죠."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소화한 만큼 아이가 감정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군요. 아이가 그 상황을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제 반응을 보면서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니 훨씬 마음이 편해지네요."
"좋아요. 그리고 훈육이 끝난 후에는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라고 물어보면서,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도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훈육 상황에서는 아이가 잘못했다고 느끼는 것도 필요해요. 그래서 그럴 때 긍정적인 피드백을 해주기보다는 훈육이 끝난 후에 아이가 위축되지 않도록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잠시 멈췄다가 물었다.
"그리고 훈육을 하는 부모의 감정도 중요해요. 훈육할 때, 오연님은 어떤 감정을 느끼세요?"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저는... 불안해요. 현지가 속상해하는 게 싫고,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저는 사실... 남편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점점 감정이 커져서, 나중에는 자기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화를 내게 될 때가 있어서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러다 보니 애들이 느리게 행동하면 제가 먼저 해버리거나 대신 도와주곤 했어요."
말을 하며 나는 스스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제가 이렇게 하면 아이를 더 의존적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을 피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그동안 현지가 아빠에게 혼나는 게 싫었다. 그래서 갈등을 줄이기 위해 아이가 혼날 만한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빨리 준비하지 않으면 대신 챙겨주고, 실수할 것 같으면 미리 개입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현지는 점점 더 부모의 반응을 의식하게 되었고, 결국 자꾸 눈치를 보게 된 게 아닐까?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 말을 들으니 저도 오연님을 더 잘 이해하게 되네요. 그동안 오연님이 그런 상황을 통제하려고 애를 많이 쓰셨군요. 그래서 더 힘드셨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계신 것 같아요."
이어서 선생님은 조용히 물었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올까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이 다투는 걸 보면서, 내가 뭔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 말을 하고 나니, 가슴이 묵직해졌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거실에서 들리는 부모님의 목소리. 방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나. '내가 말을 잘 들었으면, 내가 공부를 더 잘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그래서인지... 가족 사이에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는 게 두려운 것 같아요."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했다.
"오연님이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아이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중요한 건, 부모가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주는지예요."
나는 내 마음에 잠시 머물렀다.
그 머무름은 사랑하는 가족이 잘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마음이 이루어지지 않아 힘들었던 날들, 좌절하고, 자책했던 나 자신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위로였다.
선생님이 조용히 물었다.
"오늘 상담 어떠셨어요?"
"힘들었어요. 근데... 조금 후련하기도 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 안에 이런 마음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요."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천천히 알아가고 계신 거예요. 다음 주에 또 만나요."
상담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조금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