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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스 노트

spice 01. 이 이야기의 시작

by LIFESPICE 김민희
The first page of this story(2024)_Pencil drawing on Arches(56X76cm)



spice 01. 이 이야기의 시작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사실 불과 몇 해 전 까지는 보고 전날까지 밤낮을 잊고 열심이었던 열혈 디자이너였다. 대학생 때 인턴을 했던 디자인 회사에 취업을 하고, 꽤 긴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나니, 그 첫 회사는 나의 20대와 30대의 중요한 지점을 함께 지나 어느새 나의 마지막 회사가 되어있었다.

정신없이 일하던 그 시절에도 마음 한편에는 가보지 못한 길들에 대한 궁금증도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는데, 종종 일이 안 풀리거나, 내 마음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하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일 때면, 유독 고개를 들곤 했다. 일종의 디자이너의 한풀이나 혹은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 비법인 마냥, '저 브랜드가 내 것이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혹은 내가 뭔가 만든다면 이렇게 만들었을 텐데, 이름은 이렇게 지어볼까?' 등 다양하고 개인적인 상상들을 구체화해 보고 적어보던 일은 꽤나 효과적이던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물론 그러다가 일이 또 잘 흘러가면 잊고 지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고등학교 땐 대학교만 들어가면 고민이 끝나는 줄 알았고, 대학생땐 취업만 잘하면 고민이 끝나는 줄 알았던 것 같은데, 40대가 되었더니 언제 속시원히 답을 찾았던 적이 있나 싶게도 40대의 무게에 걸맞은 좀 더 복합적인 고민들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무엇을 하고 살 것인지, 혹은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뭔지 등 진작에 해결하고 싶었던 질문들도 답해보지 못한 채 시간만 가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그저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던 그 시간을 통과하니, 결국 그 끄트머리에 불쑥 새롭게 시작할 마음이 생긴 날이 찾아왔다. 그때 결심했던 것 같다. 이제 상상만 하지 말고 내 그림을 그려보자. 그렇게 가장 익숙했던 것을 떠나왔다.


지금 안착해 있는 조금 다른 이 세계도 적당히 한다고 될 리가 없는 또 다른 거대한 세계여서, 그림을 시작한 지 고작 4년 차인 나에게 드라마틱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래도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렇게 고민이 되었고 떠남과 떠나지 못함을 재야 했던 지난날 속에서도, 결국 나는 하나의 길 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혀 다른 길인 줄 알았던 이리저리 나누어진 길이 아닌, 그 길을 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길이었음을. '나'라는 사람은 결국엔 스스로 모든 고민의 단계를 밟아야 나아가지는 사람이고, 생각이 정리되는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헤매는 듯싶다가도 결국은 한 방향일 것이라는 이 믿음 덕분에 예전처럼 불안하지 않게 되었다.


이젠 내 책상에서 내 마음에 드는 스탠드를 켜고, 한 밤 두 밤 모아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또 언젠간 나의 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이 이야기가 시작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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