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ce 02. 네모난 종이 위에 바람이 분다
내 그림을 연필로 그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건 2023년 늦가을에 열렸던 나의 첫 개인전을 마쳐가던 즈음이었다. 첫 전시이기도 하고, 내 그림을 보러 와주는 분들을 가까이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거의 매일 전시장에 나가 있곤 했는데, 전시준비로 인해 나 홀로 바빴던 일들이 모두 끝이 난 데다가, 시간을 내어 와 준다는 고마운 지인들을 기다리느라, 그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시간들이 정말 많았던 기억이 난다. 2주간의 전시기간 동안 하얀 전시장 벽에 걸어둔 내 그림들을 보러 와 준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내 그림에 공감해 주었고, 누군가는 앞으로의 길을 응원해 주었고, 또 누군가가 남긴 소중한 감상평부터, 작은 부분들까지 꼼꼼하게 들여다봐 준 누군가의 뒷모습까지... 다양한 것들을 부지런히 마음에 담았다. 첫 전시였던 만큼 작은 이야기들까지 모두 고맙고 소중했던 것 같다. 전시가 끝을 향하던 즈음엔 이제 내년엔 뭘 그려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잊고 있던 연필의 질감이 떠올랐다. 보송보송하고 포근한 연필, 밝음과 어두움의 단순함이 편안한 연필, 연필의 그 포슬포슬한 맛이 떠올랐다. 그동안 컬러풀한 작업을 주로 해오던 나에게 반대의 지점에 있던 연필이란 재료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필작업이 어울릴만한 결이 고운 세목*종이를 주문했다.
*세목 : 수채화 종이 중 고온고압으로 압축하여 표면이 매끄럽고 부드러운 종이
전시 이후로 미루어왔던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하고 나니, 어느새 겨울의 한 중간에 와 있었다. 게으름도 피울 만치 피웠겠다 길 건너 화방에 들러 연필을 잔뜩 골랐는데, 세상에서 제일 단순하게 보이는 재료가 고를 것이 뭐가 있을까 싶겠지만, 들여다보면 단단한 정도나 진하기에 따라 선택할 것들이 잔뜩이다. 게다가 브랜드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 물감과는 달리 연필은 저렴하다 보니 H연필부터 2B, 4B, 6B, 8B, 10B, 12B 등 고민 없이 넉넉히 골라 담다 보면, 바구니 안이 금세 수북해진다. 지난번에 주문해 둔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패널에 마스킹 테이프로 고정해 두고, 가장 연한 연필부터 골라 들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종이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연필의 끝에 얇은 선들이 차분하게 쌓여간다. 마치 톡톡 자른 보드랍고 가느다란 실을 종이 위에 포근하게 쌓는 것처럼 말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 이 그림의 끝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연필 선들이 흐트러지려는 순간도 있다. 그런 순간엔 꾹 참고 더 신중하게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조용하고 천천히 연필로 시간을 쌓아가다 보면, 네모난 종이 위에 내가 상상하던 세상이 조용히 윤곽을 드러낸다. 그림 안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고, 포근한 빛을 비추면 어느샌가 풀이 자라나고, 구름이 드리운 그림자도 지나가고, 푸드덕 새도 날아간다. 종이 위에 비로소 바람이 불어오고, 풀들이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하며 바람결에 춤을 추는 것이다. 비어있던 하얀 종이 위에는 어느새 내가 만들어낸 세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 가운데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본다. 누운 자리 바로 옆, 손이 닿는 곳에는 잊지 않고 준비해 온 시원한 음료수도 꺼내두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책을 오늘만큼은 꼭 읽어보리라 펼쳐 들었지만,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반짝이는 소리에 책은 또다시 덮어 두고 말았다. 따뜻한 바람은 구름을 싣고 들판을 넘고 내 이마를 넘어 빠르게 지나간다.
네모난 종이 위에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