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ce03. 봄날의 팝콘로드
이번 겨울에는 눈이 정말 많이 왔다. 한번 오기시작하면 얼마나 많이 오던지, 눈 위로 한걸음 걸을 때마다 신발이 푹푹 들어가, 부츠 안으로 눈이 떼구루루 들어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겨울 중 가장 눈이 많이 왔던 겨울로 기억될 것 같다. 그래도 날씨는 다른 해만큼 춥지는 않은가 싶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강추위에 대한 내 개인적인 판별기준인 ‘눈썹에 동글동글 얼음이 맺혔는가?’, ‘차가운 공기에 콧 속이 쨍하니 얼어붙는 것 같은가?’ 하는 부분에는 영 못 미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방심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나 다를까 지난 일주일은 정말 겨울다운 추위가 찾아왔다. 칼바람이 불어 공원의 나뭇가지에 한참이나 쌓여있던 눈이 마치 다시 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얗게 흩뿌려지고, 외출하기 전에 서랍에서 제일 두툼한 양말을 골라 신었는데도 발이 시린 날씨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과연 2월이구나. 이젠 조금은 지겨워져 버린 겨울에 이별을 고하고, 따뜻한 봄이 어서 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 그림은 작년 이 맘 때쯤에 그렸는데 그때도 아마 지금의 내 심정과 비슷했었나 보다. 2월에 봄날의 벚꽃 길을 그린 것을 보면 말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팝콘로드(Popcorn Road)이다. 봄밤의 길을 따라 핀 벚꽃을 하얀 팝콘처럼 표현했었는데, 창문을 잔뜩 열고 드라이브 중인 페프리카*씨의 뒷좌석에는 고소한 팝콘이 벚꽃인지 팝콘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함께 흩날리고 있는 중이다.
*페프리카(Pepprika) : 라이프스파이스 그림에 주인공으로 늘 등장. 인생의 묘미를 찾는 Lifespice의 주인공답게 'Pepper'와 'Paprika'의 합성어로 만들었다.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벚꽃이 절정이던 어느 봄밤에 딸아이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었다.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길을 따라 하얗게 흐드러져있는 벚꽃들이 달빛을 받아 더 하얗게, 마치 방금 튀긴 팝콘 같았는데 어디선가 톡-토독!! 토도독!! 하고 팝콘 튀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코 끝에 진한 버터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었다. 벚꽃을 실컷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집에 돌아가서 팝콘을 튀길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딸아이와 귀여운 수다를 떨며 발걸음을 재촉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와서는 여지없이 부엌 찬장에 넣어두었던 팝콘기계를 꺼내고 말았는데, 고소하고 짭짤한 버터를 넉넉히 잘라 넣고 팝콘 옥수수는 양심껏 두 스푼 정도 넣었던 것 같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팝콘 기계는 옥수수를 뜨겁게 달구더니 이내 톡!! 토도독!! 하고 열심히 팝콘을 튀겨내고는, 그릇에 하얀 벚꽃 같은 고소한 팝콘을 우르르 쏟아내었다.
2월이 지나고 3월이 오면 아마 봄에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다. 얄궂은 꽃샘추위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 추위가 가시고 나면 나무에 초록이 움트고, 아침에 입고 나온 겉옷이 조금 거추장스러워질 것이고, 그러고 나면 엉뚱하게 팝콘 생각이 나게 할 하얀 벚꽃이 각자의 자리에 또 피고 지고 할 것이다. 그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또 벚꽃길을 걸으러 밤 산책을 나가야지. 올해는 봄의 축제 같은 그 밤을 더 자주 걸어보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