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ce 05. Summer around the corner
2023년 5월 즈음이었다.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이태원 앤틱 & 빈티지 플리마켓'소식을 보게 되었는데, 코로나의 긴 터널이 끝나가던 시점이었기도 하고 지독하게 집콕하며 지내던 시기를 지나 조금은 희망찬 새봄을 맞이한 때여서 그랬는지, 평소 앤틱 소품이나 빈티지 소품에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그 주 주말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이 들었었다. 재밌는 물건을 만나면 꼭 두어 개 데려오리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쩌면 오랜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 인파의 흐름에 따라 함께 걸으며, 활기찬 기운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한동안 여행도 못 가던 시기였으니, 반 정도는 작은 여행과 같은 기분을 제법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게 되어, 돌아오는 주말을 꽤나 기다렸었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주말이 오고 찾아간 이태원 앤틱 가구거리에는 5월의 중간이라고 믿기엔 너무 뜨거운 더위가 찾아왔었다. 갑자기 찾아온 더위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는데 내리쬐는 햇볕에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고, 입고 갔던 긴팔 셔츠의 팔목 단추를 풀러 잔뜩 접어 올렸는데도 그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더위와의 사투를 벌이며 앤틱 가구거리를 따라 내려오던 길 모퉁이에서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바깥으로 난 창 하나에 그 밑에 두어 개 놓인 의자 몇 개가 전부인 작은 카페였는데, 더운 사막에서 오아이스를 발견한 것 마냥 어찌나 반갑던지, 바로 달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진하게 내린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컵 안에 달그락거리는 얼음조각을 하나 입에 넣고 열을 식히고 나니, 그제야 주변 가게들의 재밌고 이색적인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눈앞 가까운 가게에는 챙이 넓은 보닛 모자를 팔고 있었는데, 오늘 입고 온 옷이랑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이 맘에 드는 라탄 소재 보닛모자를 하나 골라 썼다. 햇빛을 넉넉히 가려주고 턱 밑으로 간단한 리본을 묶을 수 있는 모자였는데, 앤틱 & 빈티지 플리마켓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라면 선뜻 고르지 못했을 보닛모자여서 그런 것인지 마치 빈티지한 엽서 그림 속의 여인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챙 넓은 모자까지 완벽한 준비를 마치니 저기 골목 끝에서 땀을 식히는 시원한 바람도 불어왔던 것 같다.
사실 재밌는 물건 두어 개는 사게 될 수도 있겠지 싶은 마음에 제일 커다란 에코백을 준비해 갔었는데, 마음만 앞선 것인지 결과적으로는 손으로 꼭 쥐어지는 작은 사이즈의 도자기 인형 2개와 나를 더위에서 구해 준 라탄 보닛모자가 그날 수확의 전부였다. 나는 처음 가본 '앤틱 & 빈티지 플리마켓'이었지만, 알고 보니 시작한 지 10년은 된 오래된 플리마켓이었는데, 아마도 몇 해 더 가보면 좋은 앤틱소품을 골라내는 내 안목도 높아지겠지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랬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인파를 따라 걷던 그 유쾌했던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시간이 지나 그날의 추억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 'Summer around the corner'라는 그림을 그렸었는데, 그날 더운 날의 오아시스 같았던 모퉁이 카페와 커다란 여름나무 그늘의 시원함에 못지않았던 플리마켓에서 샀던 모자, 그리고 골목 끝에서 불어왔던 시원한 바람을 그려두고 싶었다.
어째 해마다 봄은 점점 더 짧아지는 것 같아서, 올해도 5월 즈음이면 벌써 길 끝의 모퉁이를 돌아 여름이 일찍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그럼 가방 속에 라탄 보닛모자를 접어두었다가 더위가 찾아오면 언제든 눌러쓸 수 있도록 채비해 두어야지. 그리고 올해도 가벼운 마음으로 5월의 플리마켓을 기다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