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경험한 성패트릭의 날
아침 일찍부터 초록 옷을 입은 인파가 한 방향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다운타운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층 숙소 덕에 창 밖으로 이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조망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여기는 미국 시카고 시내 한복판이다.
초록빛 거대 인파의 이동은 마치 초록 개미들이 여왕개미가 있는 곳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과흡사하다. 멀리서 보이는 광경은 초록 무리의 이동 그 자체다.
나도 엊그제 시카고로 오는 공항에서 구입한 초록색 후디를 꺼내 입고 이들 행렬에 참여하기로 한다. 시카고 다운타운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시카고 강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여지는 오늘, 바로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이다.
오전 10시가 되자 시카고의 젖줄이 야광 초록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대형 배가 강물을 가로지르며 생물에 무해한 초록색 염료를 뿌리기 시작한다. 일찌감치 강 주변 및 다리 위에 모여있던 초록 인파들이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강물을 지켜보며 환호한다.
성패트릭의 날은 아일랜드 명절로,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기념하던 날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날이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미국인들의 문화의 장으로 정착되었다. 특히 시카고에서는 1962년부터 매년 성패트릭의 날을 기념해 강물을 초록색으로 바꾸는 'Chicago river green' 행사를 개최한다. 이날이 되면 시카고 강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인종과 국적, 종교에 상관없이 다 함께 초록색 옷을 입고, 초록색 음식과 술을 마시며 화려한 퍼레이드를 즐기는 문화의 장이 펼쳐진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는 말이 있다. 세계 어디에 있든 그 사회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뜻이다. 성패트릭의 날에 같은 색 옷을 입고 음식을 나누며 다 함께 어울리다 보니 낯선 이방인에서 어느새 하나 된 공동체임을 느끼게 된다.
시카고 전체가 초록으로 물들었다고 해서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같은 모습은 결코 아니다. 초록의 무리 안으로 들어가면 멀리서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광경이 보인다.
한쪽 길을 따라 독특한 초록 옷차림을 입고 2단짜리 높은 자전거를 타고 단체로 움직이는 그룹이 보인다. 그들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의 플래카드도 걸고 있다. 또 다른 쪽 길가에는 초록으로 분장한 젊은이들이 다 같이 둘러앉아 초록색 음료와 핫도그를 입에 물고 또 다른 입장 표현을 하고 있다. 겉으로는 초록색으로 하나가 되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각기 다른 개성을 표현하며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처럼 이 사회는 다양한 인종, 각기 다른 언어, 여러 종류의 소수 그룹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견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을 한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입장을 터부시 하지도 반목하지도 않는다. 거대한 미국 사회가 꾸준히 안정을 유지하며 발전해 가는 이유가 이처럼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초록으로 획일화된 듯 보였던 시카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어느 사회보다도 다양한 모습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미국을 '샐러드볼(salad bowl)' 이론에 빗대어 말하고들 한다. 즉, 다양한 채소와 과일이 각기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조화를 이루는 샐러드볼이 미국의 현주소와 유사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샐러드볼과 멜팅팟(melting pot)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초록빛으로 물든 시카고 시내 한복판에서 초록빛 맥주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에 빠져본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중> 은 일상에 대한 고찰 및 다양한 기억을 소환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루를 기록하고 잊고 있던 소중한 추억과 행복했던 기억, 제 곁을 지켜준 사람들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이나 공감하는 내용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