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
결혼 25주년 여행지를 고래상어와 스노클링을 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보홀로 정했다. 평소 여행 가고 싶었던 곳은 야생동물들을 볼 수 있는 아프리카, 코끼리목욕 체험을 하는 태국, 물개가 벤치에 쉬고 있다는 갈라파고스 등 야생동물을 보거나 동물과 관련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10여 년 전 호주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도 순전히 돌고래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소개에 탕갈루마 섬으로 들어갔었다. 해파리와 함께 수영할 수 있다는 얘기에 팔라우로 가족여행도 갔었다. 팔라우는 가족들 모두 만족도가 최고여서 지금도 모이면 그때의 얘기를 하곤 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해도 고래상어를 스노클링 하면서 볼 수 있는 곳은 원래 세부의 오슬롭뿐이었다.
오슬롭은 세부섬의 거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리조트에서 이동하려면 새벽 1~2시에 출발해 3시간 정도를 차량으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서 매번 세부를 갈까 하다가도 무리한 일정 때문에 계속 미뤘는데 이번에 여행지를 찾아보다가 세부섬 옆의 보홀에도 고래상어가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최근 보홀에 직항이 생겨서 한국에서 편하게 갈 수 있고 고래상어 포인트인 릴라해변까지는 리조트에서 40분 정도의 거리라 모든 조건이 만족스러웠다. 남편도 4시간 30분 정도의 짧은 비행시간에 만족하며 보홀에 찬성했다.
보홀은 7,000여 개가 넘는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에서 10번째로 큰 섬, 제주도의 2.2배만 한 크기이다. 지도에서 보면 세부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흔히들 보홀로 여행 간다고 하면 실제로는 보홀섬의 왼쪽 귀퉁이에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팡라오섬을 가는 것이다. 새벽 2시쯤 팡라오섬의 공항에 도착해서 차로 10분 이동하면 바로 두말리안비치의 리조트이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던 해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갈색으로 말린 야자수 잎을 초가지붕처럼 엮은 리조트 발코니에서는 바다가 바로 눈앞에 보인다. 50여 미터 잔디밭을 지나 해변 모래사장에 서면 에메랄드빛 바다가 잔잔하게 펼쳐져 쨍한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고 좌우 고개를 돌려봐도 보이는 건 끝없는 하얀색 모래해변과 나란히 늘어서있는 초록잎 야자나무뿐이다.
아침의 바다는 고운 밀가루 같은 모래 위에 길고 구불구불한 선을 그려대고 썰물 때라 100여 미터 정도 물속으로 들어가도 무릎 정도의 깊이다.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불가사리는 흔하고 조개, 군소, 해삼등이 모래 위에 뒹굴고 있다. 현지인이 어망을 들고 무언가를 캐는 모습도 간혹 보인다. 하루종일 야자나무 그늘아래 비치체어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일 년 내내 최고기온이 29도에서 32도 사이이고 습도도 낮아서 한낮의 햇볕 아래만 피하면 쾌적하게 느껴졌다. 약간 땀이 맺힐 정도의 따뜻한 햇살 아래 발목까지 잠기는 바닷물 위를 걷다 보면 시간이 아무 의미 없고 모든 게 여유로워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여행 4일 차 되는 날, 드디어 고래상어와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서 릴라해변으로 출발했다. 고래상어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어류이며 멸종 위기 종으로 분류돼 보호되고 있는 동물이라고 한다. 약간의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설레며 아침 7시쯤 출발했다. 필리핀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고 관리하는 곳이어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주의사항을 듣고 난 후 차례를 기다렸다. 한 타임당 스노클링 할 수 있는 시간은 30분이고, 바다로 입장하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었다. 전전날의 발리카삭 거북이 스노클링투어 때처럼 파도가 거칠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릴라 바다는 잔잔했다.
이제 우리 순번이 되었고, 구명조끼와 장비를 챙겨 작고 길쭉한 카누 같은 모양의 나무배에 2명씩 나란히 앉아 가이드와 선장까지 해서 총 7명의 인원이 승선했다. 배를 타고 1~2분 들어가면 바로 고래상어가 있는 곳이었다. 해변에서 100미터도 안될 거 같은 거리다. 고래상어의 먹이인 새우를 던져주는 관리자가 있고, 매일 오전에 고래상어가 이곳 릴라로 오는 것이다. 물론 매일 오는 마리수도 다르고, 고래상어가 오지 않는 날도 있다. 그날은 고래상어가 모두 5마리 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린 한 마리의 고래상어하고만 스노클링을 했다. 물속에 있는 시간도 짧고 투어가이드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했는데, 아마도 위험 때문에 여기저기로 이동하지 못하게 한 거 같다.
물속에 들어가서 앞으로 헤엄치는데 바로 고래상어의 회색 몸통이 보였다. 짙은 회색 바탕에 하얀 점무늬를 한 커다란 꼬리지느러미가 보였고 유유하게 움직이면서 연신 직사각형 같은 입을 벌려서 새우를 물처럼 마시는 거다. 난 계속 천천히 고래상어의 왼쪽 옆에 붙어서 녀석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녔다. 눈동자를 쳐다보고 고래상어의 몸에 붙어있는 빨판상어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잔뜩 매달린 모습도 바라보고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여러 겹의 아가미도 보면서 혹시라도 녀석의 몸을 건드릴까 봐 최대한 조심하면서 움직였다. 고래상어의 얼굴을 보면서 스노클링을 했기 때문에 크지 않게 기억됐는데 나중에 가이드가 찍어준 동영상을 보니까 내 몸의 족히 10배 이상의 거대한 덩치였다.
파도도 잔잔하고 고래상어도 천천히 식사를 하는 중이라 그런지 모든 것들이 평화로웠다. 나와 고래상어 둘만 같이 수영을 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그냥 옆에 나란히 서서 얼굴을 보고 몸을 보고 신기한 맘으로 하루종일 그러고 있어라 해도 있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순간이 현실로 이뤄진 거다. 이걸 하려고 보홀을 온 거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행복하고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지금도 고래상어와 스노클링 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 20여분의 짧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항상 고래상어의 눈이 떠오른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여행 전에 갑자기 코로나가 걸렸고, 코로나 걸리고 9일 후에 컨디션이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로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 첫날부터 몸이 힘든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점심을 먹고 급기야 체했다. 아마도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들을 먹다 보니 그랬던 거 같다. 그래서 그날은 저녁까지 꼬박 굶었고 4일째 되는 날은 도저히 속이 메슥거려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서 한식당을 찾아갔다. 김치찌개를 먹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남편은 몸이 안 좋으면 그냥 고래상어 투어는 취소하자고 했고, 사실 나도 고민을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취소를 하면 두고두고 너무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맘을 단단히 먹고 고래상어 투어날은 아침도 억지로 꾸역꾸역 먹고 영양제도 챙겨 먹었다. 그래도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래상어와 스노클링을 하고 나온 순간부터 몸이 가벼워졌다. 갑자기 배가 고프고 직전까지는 입맛도 없어 손도 대지 않던 간식을 찾았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컨디션이 회복된 건지, 아니면 심리적인 영향인지 그 순간부터 여행온 이래로 가장 좋은 상태가 되었다. 남편은 조울증 아니냐고 농담을 했다. 그날의 경험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치 내가 바다와 한 몸이 된 거 같다고 할까, 만화에서나 보던 상상의 세계를 직접 겪은 거 같다고나 할까. 후다닥 정신없이 지나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래상어와 나란히 스노클링 한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것을 하기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것을 더 찾게 되는 스스로의 모습에 이래선 안된다 하면서 한 달에 한 가지 정도는 새로운 것, 낯선 것을 경험해 보자고 혼자 결심했었다. 그래서 전시회도 가고, 안 가본 장소도 가보려고 하고 억지로라도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보홀여행을 추진했던 것도 새로운 것을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 한몫을 했다. 사실은 여행도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고 여행준비하는 것도 귀찮았고 출발할 때는 큰 기대가 없었다.
여행 초에는 남편과 나 둘 다 낯선 곳에 온 경계심과 긴장감으로 예민해져 있었고, 환전을 하거나 식당을 찾는 단순한 문제도 결정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서로 힘들어했다. 식당을 정하는데 1시간 찾아 헤매고, 망고를 파는 과일가게를 찾아 또 한 시간 걷고, 과장하면 이런 식이었다. 그러다가 7일간의 여행 중 이틀 정도 일정이 남았을 때 둘 다 너무 시간이 짧다고, 이제 좀 적응해서 편안하게 즐기려고 하니까 돌아갈 날이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새롭고 낯선 곳도 시간이 지나면 다 적응이 되는 법이고 도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오래간만에 다시 느꼈다. 이제 하고 싶다고 생각만 했던 것들은 하나씩 실천해 봐야겠다. 어딘가에 꼬깃꼬깃해진 채 잊혀있던 버킷리스트들도 찾아서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 보홀과 고래상어가 내 속에 잠들어있던 도전의지를 다시 깨워준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