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직원과의 관계 형성 대 실패 이야기
지금 다니고 있는 세 번째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나는 사회생활 5년 차였다. 그래서 마냥 어리지도 않았고 사회생활의 흐름도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시간이 걸리는 나에게 있어 새로운 회사에 입사를 하고 그곳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회사에 적응해나가고 있던 그때, 내 앞길 챙기기도 바쁜데 다른 팀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직원은 모든 직원이 남자로 구성되어 있는 영업부의 유일한 여직원이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이 곳이 첫 번째 회사였다. 영업부 직원들은 대체로 외근이 많아 사무실을 자주 비우지만 서류 작업이 필요한 일이나 사무실에서 해야 하는 일들도 있었으므로 그런 일을 위해 사무실에 상주하는 직원이 필요하다. 그 직원은 소위 말하는 영업부에서 어드민(지원) 업무를 하는 직원이었다.
이 어드민 업무라는 것의 범위는 무궁무진하다. 내가 속한 회계팀 같은 경우, 다른 팀에 비해 비교적 업무가 명확한 편이다. 그러나 어느 회사를 가든 그레이 존은 있게 마련이고 그런 경계에 있는 업무에 한해서만 우리 팀에서 하든 다른 팀에서 하든 그 부분만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하면 된다. 그런데 어드민 업무의 경우는 경계가 모호한 일이 많다. 영업부에서 서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업무와 언제 생길지 모르는 업무들에 대해서도 도움을 줘야 한다. 그렇지만 그 직원은 싹싹함과 밝은 성격으로 그 일들을 모두 처리해내고 있었다.
그녀 위의 상사는 영업 본부장이었고 부서 내에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업무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도 잘 몰랐을 것이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또 다른 팀에서 도와달라는 대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일이 점점 늘어났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업무 협조를 잘해주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여우 같은 성격이거나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겪어봐서 일을 잘 쳐내는 사람이라면 분명 거절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일을 돌렸을 거다. 하지만 그 직원은 그런 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직급도 많은 사람들이 시키는 일이니 거절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새로운 회사에 적응을 해가고 있는 와중에 그 직원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고 잘 도와줘서 고맙기도 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해서 어떻게든 도움이 돼주고 싶었다. 나는 회사 사람들하고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편도 아니고 밖에서 개인적으로 거의 만나지도 않는다. 회사 밖으로 회사 안의 관계를 끌고 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직원 하고는 점심때 가끔 밥을 먹거나 나에게 부탁하는 일이 있으면 도움을 주려고 하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회사에 서서히 적응해가면서 마음이 편해졌고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항상 밝게 인사하고 무슨 부탁이든 씩씩하게 대답하고 들어주던 그녀였는데 어느샌가 목소리 톤도 낮아지고 대답을 해도 좀 심드렁했다. 많이 힘든가 보다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업무를 덜어줄 수도 없었고 같은 부서도 아니니 직접적으로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와 가끔 점심을 먹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나에게 힘든 일의 속내를 다 털어놓을 만큼 친하지도 않은 딱 그런 정도의 사이였다. 그래서 힘들겠거니 짐작을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 자리에서 뭔가 업무를 보고 나서 나에게 저녁에 시간이 되냐고 물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왜? 나 저녁에 회사 사람은 안 만나는데...
그때의 내 머릿속엔 회사 사람은 적어도 점심시간이나 업무시간에만 만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콕 박혀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녁에 회사 사람들과 절대 안 만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 팀 사람들도 다 있는 앞에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그런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나도 저 말을 하고 나니 아차 싶어서 무슨 일인데? 물었더니 별 일 아니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곧 퇴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사실이었다. 나중에 그녀에겐 너를 만나기 싫다는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제 그녀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저녁 대신 퇴사하기 며칠 전에 다른 직원과 함께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이제는 나한테 마음의 문을 닫은 듯했다. 어차피 퇴사하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전에는 항상 밝게 웃고 무슨 얘기를 하든 긍정적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게 다 지긋지긋하고 지쳐 보였고 무성의했다. 여태까지 좋았던 그녀의 모습마저 거짓같이 느껴져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 지점에서 나는 내가 처음 회사를 그만두었던 시기를 떠올렸다. 그만둘 날이 가까워져 오자 사람들에게 까칠하게 대하고 무성의했던 나의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나에게 못되게 군 사람도 있었지만 잘해준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저 내 감정에만 휩싸여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토록 열심히 일했던 회사와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테니까.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영업부가 한창 바쁠 때, 연마감을 앞두고 퇴사를 했다. 만약 좋게 나가는 거였더라면 그녀는 바쁜 시기까지는 일을 하고 나갈 만한 의리는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치고 짜증이 났으면 이렇게 빨리 그만뒀을까 싶어서 안타깝다가도 결국 그 뒤치다꺼리는 결국 나나 우리 팀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 약간 원망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녀가 퇴사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난다. 신입사원들을 보면 특히나 더 그렇다. 나한테 무슨 해답을 바라고 저녁에 따로 보자고 한건 아니었을 거다. 그냥 내가 평소에 조금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가끔 점심도 먹었고 이직을 해본 경험도 있으니 뭔가를 물어보고 좀 들어보고자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같은 말을 메신저로 물어봤다면 나는 한참 생각하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약속도 잡았을 거 같다. 그런데 저녁에 보자는 말을 면전에서 들으니 당황해서 그랬는지...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실제로 나한테 저녁에 보자는 말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왜 저녁에 만나자는 거지? 우리가 저녁에 따로 만날 만큼 친한가?'였고 그래서 그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간에 선을 딱 그어버려서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 게 결코 좋은 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선긋기를 쓸데없이 잘한다는 것이다. 상황은 변하고 관계도 변화하므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 완급조절을 잘해야겠다.
내가 그녀를 저녁에 따로 만나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해서 퇴사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그즈음엔 표정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고 조직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도 않기 때문이다. 많이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 용기를 내서 시간을 내달라고 물어볼 정도면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인데 나는 멍청하게 왜 그랬을까라고 자책을 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타입도 아니면서,
나는 그저 다정한 선배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던 걸까?
요즘은 신입사원들과 나이대가 벌어져서 그나마 신경이 덜 쓰이고 다가가기가 조심스럽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신입사원만 보면 자꾸 나의 신입사원 시절이 생각나서 말이라도 한 마디 더해주고, 고맙다고 하고, 그쪽이 부탁하는 일을 잘해주려고 했었다. 그들을 모습을 보면 긴장감으로 굳어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자꾸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신입사원일 때, 나에게 공감해주거나 나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 너무너무 고마웠으니까. 정말 별거 아닌 걸로도 업무나 인간관계에서 삽질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나도 뭔가 그런 흉내를 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인간적으로도 따뜻한 사람이면서 일도 잘 알려주는 나의 첫 번째 상사 같은 사람이 될 순 없었다. 그 사람은 천성이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냥 나인데 그러니까 따뜻한 척(?)은 좀 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안 따뜻한(?) 사람. 친절한 듯 하지만 선을 잘 긋고 내 영역에 사람을 들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 그런데 나는 가당찮게도 드라마 속에 나오는, 곁을 잘 내주면서 배려심도 깊은 다정한 선배 이미지를 감히 흉내 내려고 했던 거다. 나는 그런 게 잘 안 되는 인간이란 걸 이 친구와의 관계를 마무리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그 뒤로는 어설픈 친절함을 내 것인 양 가장하고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런 걸 잘 못하는 인간이니 섣부르게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 방식대로, 내가 생겨먹은 대로 하기로 했다.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고 가벼운 대화를 건네는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제는 연차가 더 쌓이다 보니 신입사원을 봐도 다른 세상의 사람 같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우리 팀에 들어온 막내 사원을 볼 때만큼은 예외다. 이상하게 그녀에게서 자꾸 옛날의 내 모습을 발견해서 놀란다. 그녀는 분명 나와 성격도 다르고 일처리 방식도 다른 사람이지만 예전에 내가 했던 업무들을 고스란히 하고 있으니 내 모습과 겹쳐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10년 전의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이었던 내가 사람들에게 저렇게 보였겠구나 싶고, 그동안 내가 들었던 충고들이 떠오르고, 그런 나에게 일을 알려주고 도와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그런 그녀를 어떻게 일로서 대해야 할까 생각한다.
일로서 서로 부탁한 일을 기한 내에 잘 처리해주고, 일로서 나나 우리 팀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해줄 수 있는 선에서 해주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함이다. 다른 팀의 직원들도 나를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회사에 보탬이 되려고 일을 하고 나 또한 회사의 이익을 위해, 세법과 회계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회사에 돈을 받고 일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후배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면서 앞길을 잘 이끌어주는 '따뜻한 선배' 이미지에 계속 미련이 남는 것은 왜일까?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것들, 그러니까 이해관계로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생각하지 못한 다정함을 느낀다던지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일 거다.
이젠 누군가가 나에게 고민이 있다고, 저녁에 따로 만나자고 한다면, 기꺼이 응할 것이다.
물론 밥도 커피도 술과 고기까지도 내가 살 거다. 그 직원에게는 여전히 미안하다. 자신을 잘 알아채지 못한 미숙한 나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줬다. 그녀는 퇴사하고 좀 쉬다가 우리 회사에 입사할 때 면접관이었던 분이 계신 회사로 가서 일한다고 들었다. 긍정적이고 밝고(혹은 밝으려고 노력하고) 심성이 고운 그녀는 어딜 가도 잘 지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천성이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라 분명 그 누군가에게 다정한 선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