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발언 그 후의 이야기
'팀장님께 폭탄발언 : 저 주 35시간제 할래요 (3)'(https://brunch.co.kr/@lifewanderer/5)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팀장님께 주 35시간제 계약을 제안했다가 까이고(?) 조용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 다만 (2020년) 7월부터 근무시간을 9:30-18:30에서 8:00-17:00로 변경했다. 여름이라 해가 일찍 뜨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는 게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나기 싫어질 때마다 내가 이 시간을 절대 사수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에게 저녁 시간은 절대 없다고 생각하니 피곤해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출근 직후 30분의 시간 동안 뭘 할까 고민했다. 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공부나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쓰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그 시간을 써야 했기 때문에 남들의 보는 눈이라는 제약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팀장님도 개인적으로 자격증 공부를 하신다 하고, 올해 입사한 막내 사원이 면접 때 ‘저는 ㅇㅇㅇ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했는데 입사해서도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자극받은 동료도 해당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나만 업무 관련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사실 평상시 같으면 어림도 없었다. 예전에도 자격증 시험에 응시해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자격증 취득을 하려면 공부에 쏟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그 시간을 언어 공부나 책을 읽는 등의 개인적인 일에 투자하고 싶어서 자격증 취득은 항상 후순위로 밀렸다. 그런데 코로나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갈 수 없다. 그리고 하다 못해 카페에 그냥 앉아있기도 어렵게 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결혼해서 전보다 멀어졌지만 이젠 아기들도 있는지라 친구들마저 만나기 어려워졌다. 연애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남았다. 유튜브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가 이 귀한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나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해당 분야에서 일한 지 10년 차가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여기까지 오기는 왔는데, 어디 가서 10년 차라고 하기가 참 부끄럽다. 사실 그만큼 실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때는 막연하게 이 일을 10년 정도 하면, 그 뒤에는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10년 이상 이 분야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팀원 모두 자격증 공부 등 뭔가를 공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 같아 좀 찔리던 차였다. 개인적으로는 10년 차가 되었으니 그동안의 10년을 한번 정리해본다는 느낌으로 시험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퇴근 시간을 바꿈으로써 저녁시간을 확보했으니 개인적인 취미활동을 위해 쓰는 시간 말고도 조금의 여유시간이 있다. 그리고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지만 안 하는 거 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시험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게 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도 인터넷 강의를 접수했고, 곧 교재가 도착했으며 아침에 출근해서 인터넷 강의를 30분씩 보기 시작했다.
대충 8시 반쯤 강의가 끝나면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한다. 자리 정리를 하고 바로 업무를 시작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에는 일이 잘된다. 8:30-12:00까지 3시간 반 동안이 오전 업무시간인데 왔다 갔다 하고 화장실 가고 등 기타 30분 정도를 뺀다고 해도 3시간을 최대치의 집중력으로 일할 수 있다. 그리고 점심을 먹는다.
일찍 출근을 하다 보니 점심 먹고 나면 급 피로해지는 것이 단점이긴 한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니 많이 괜찮아졌다. 그리고 1시 이후로는 4시간만 일하면 퇴근이다!!!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다. 야근이 있는 날만 아니면 다섯 시에 바로 퇴근할 수 있도록 4시 50분 정도부터 슬슬 퇴근 준비를 한다. 오늘 마치지 못한 일은 일단 저장하고 파일을 닫고, 메일함을 정리한다. 그리고 다섯 시 정각에 퇴근한다.
확실히 여섯 시 반에 퇴근할 때보다 길이 덜 막힌다. 그래도 집에 오면 6시 반 안쪽이 된다. 간단히 씻고,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바로 먹고 바로 방으로 들어오면 7시다. 다시 인터넷 강의를 듣기 시작한다. 회사에서는 30분밖에 못 듣지만 집에서는 2시간 정도 들을 수 있다. 그래도 9시 밖에 안 되었다. 그러면 이제 책을 읽고, 외국어 공부 등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혹은 운동하러 나갔다 오는 날이면 인터넷 강의를 1강만 듣거나 책을 못 읽을 수도 있지만 운동은 매일 하는 것은 아니니 상관없다. 똑같이 8시간을 일했는데 이렇게 저녁 시간이 길었다니, 새삼스레 놀란다. 그리고 8월부터는 중국어 시험인 HSK 시험 준비를 위해 인터넷 강의를 하나 더 추가했다. 약간 부담은 되지만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갈 수도 없어서 시간을 알차게 쓰는 기분은 든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똑같은데 일찍 일어나야 하다 보니 다소 피곤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저녁시간을 사수할 수 없어!'라는 절박함이 피곤함을 이겼다. 써놓고 보니 약간 서글퍼지기도 한다. 최근에 읽은 ‘아침 글쓰기의 힘’이라는 책에선 아침에 글을 쓰라고 하는데 나는 저녁 시간에 글이 잘 써지는 편이라 그 부분은 아직 공감하지 못했지만 저자가 말하는 아침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최종적으로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주 35시간제 근무 시도는 실패했다. 그리고 내 저녁 시간을 사수하기 위해 아침에 사투를 벌이는 이런 상황 즉 아랫돌을 빼서 위쪽에 괴는 것 같은 이 느낌은 결국은 조삼모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고 나에게 간절한 일인 데다 이렇게 했을 때 그나마 저녁 시간이 생겼으므로 당분간은 계속해 볼 생각이다.
나는 약간의 강제성이 있어야 좀 더 잘하는 사람이니까 8시에 출근해야 한다는 강제성이 있어야 일찍 일어나고 좀 더 자극을 받아 열심히 살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주 35시간제 근무 아니 더 적은 시간을 일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는 끊임없이 고민해봐야 할 숙제로 남았다. IT 관련 업종 등은 리모트 잡이나 프리랜서 등으로 근무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통용이 되는 것 같은데 나같이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일반 사무직에겐 아직 먼 나라의 이야기다.
이것은 후일담.
나 : 엄마, 우리가 근로계약이 보통 주 40시간으로 되어 있잖아. 그런데 얼마 전에 회사에서 팀장님한테 근로계약을 주 35시간으로 바꾸면 어떠냐고 물어봤었다? 하는 일은 그대로 할 거고 월급을 줄여도 좋으니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고. 그런데 이러저러해서 결론적으론 안 됐어. 일도 중요한데 개인 시간도 중요한 거 아냐? 야근 안 하고 와도 집에 와서 8시 되고 이러면 밥은 어떻게 해 먹고, 집안일은 어떻게 하냐고. 안 그래?
엄마 : 그럼. 개인 시간도 중요하지. 엄마는 말이다...
엄마가 피아노 학원 운영하던 80년대엔 회사도 주 6일제였고 학원도 다 토요일까지 수업했는데 엄만 그때도 월~금 주 5일만 수업하고 토요일은 쉬었단다.
내가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역시 그 엄마에 그 딸이다 ㅋㅋㅋ
'팀장님께 폭탄발언 : 저 주 35시간제 할래요' 시리즈 모음입니다.
1편 :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https://brunch.co.kr/@lifewanderer/4)
2편 : 팀장님께 주 35시간 제로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https://brunch.co.kr/@lifewanderer/33)
3편 : 상황이 바뀔 수 없다면 내가 바뀌는 수밖에 (https://brunch.co.kr/@lifewanderer/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