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바뀔 수 없다면 내가 바뀌는 수밖에
'팀장님께 폭탄발언 : 저 주 35시간제 할래요(2)'에서 이어집니다.
처음엔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괜히 말했나, 너무 내 생각만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현실적으로 아르바이트도 아니고 정직원으로서 모든 직원이 다 주 40시간 근무에 맞춰 일하고 있는데 나 혼자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주 35시간 일하는 것으로 계약 조건을 바꾼다면(물론 말이 많을 테니 급여는 깎을 생각이지만) 형평성 문제나 그 외 다른 말들이 나올 수 있다.
만약 주 35시간 제로 일하게 된다면 회사에서는 원래 하던 일을 그대로 다 하길 원할 것이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주 35시간을 근무하며 원래 주 40시간 일했을 때의 업무량을 그대로 잘 처리한다면 인사팀이나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 절감과 워라밸 두 가지 토끼를 다 잡기 위해 나 말고도 다른 직원들에게 주 35시간제를 강요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일하는 시간은 상관없으니 원래대로 급여를 받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최근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초과근무가 52시간까지만 인정되고 그 이상 초과근무를 해서 수입을 얻던 사람들은 급여나 수당이 감소해 생활이 팍팍하다고 말하는 의견이 실린 신문기사도 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근무시간이 있는데(예를 들면 9시-18시) 내가 한 시간 일찍 퇴근함으로써 생기는 공백은 내가 다음날 처리해도 되지만 아주 급한 일이거나 꼭 그때 해야 하는 일이라면 다른 누군가가 그 부분을 채워줄 수밖에 없다. 여름휴가나 연차는 딱 정해진 날만 자리를 비우는 것이고 나도 다른 팀원이 자리를 비울 때 그런 식으로 급한 일은 처리해주니 상관없지만 다 주 40시간에 맞춰 일하고 있는데 나만 주 35시간을 근무하면서 한 시간씩 일찍 퇴근한다면 그 한 시간씩이 계속 누군가의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 현재 근무하는 곳에서 주 35시간 제로 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 35시간제를 시행하는 기업에 대해 검색해보다 정말 유럽으로 이민을 가야 하나 같은,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도 떠올려 보았다.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돈은 조금 덜 받아도 상관없으니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개인의 삶에 좀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인데 아직은 힘든 일인 것 같다.
결국 나를 둘러싼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생각을, 나를 바꿔보자.
우리 회사는 시차 출퇴근제를 하고 있어 8시에 출근하면 5시에 퇴근할 수 있다. 일찍 퇴근하려면 일찍 출근하면 된다. 당장, 아니 아마 앞으로 10년 안쪽으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직장에서 주 35시간제를 채택해 일하는 문화가 정착될까? 어렵다고 생각한다. 30년 뒤라면 모를까.
내가 주 35시간제를 시행하는 직장으로 이직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직 일반적인 근무 형태는 아니기에 이걸 시행하는 곳은 많지가 않다. 그렇다면 내가 프리랜서를 할 것도 아니고 계속 회사를 다닐 거라면 지금 여기에, 이런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물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만 나는 원래 오후보다는 오전에 일이 훨씬 잘 됐다. 지금도 오전에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 지어 놓고 오후에 덜 중요하거나 단순한 일들을 하곤 했다. 오전에 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내가 똑같은 시간을 일해도 효율이 더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 팀 막내 사원에게는 팀장님이 입사해서도 공부해야 한다며 출근하고 30분 정도는 인터넷 강의를 보라고 허락해 주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랑 같이 일하는 동료도 퇴근시간 전 30분 정도를 공부를 하는데 쓰고 있었다. 나라고 왜 못해? 그럼 나도 출근해서 30분간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나는 그 30분을 정말 개인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들-예를 들면 프랑스어 공부-에 쓰고 싶었으나 그래도 엄연히 업무시간이고 다른 직원들의 보는 눈도 있으니 업무와 직접 관련된 분야의 공부나 영어 공부를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일하는 시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8시까지 출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다음 날 한번 일찍 출근해보기로 했다. 아직 공식적인 출근 시간은 바꾸지 않았지만 일찍 출근했을 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한 시간 가량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어라? 생각보다 버스 타고 지하철역 가는 길이 안 막히네? 그리고 지하철을 탔는데 생각보다 한산하네? 나는 오히려 지금 내가 하는 9시 반 출근이 일반적인 출근시간인 9시를 비켜 갔으니 그나마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니고 있었는데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다음날 조금 늦게 출발했더니 바로 길이 막히고 사람들이 많아진 걸 보면 확실히 8시 반 출근이나 9시 출근인데 그보다 빨리 사무실에 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여유 있게 회사 앞에 도착했다. 대신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 스타벅스에 갔다. 가서 음료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프랑스어와 중국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전자책을 조금 읽고 나니 출근시간이 다가와 사무실로 향했다. 아침부터 오늘 분량의 공부를 끝내니 뿌듯했다. 그래,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조금 힘들겠지만 이 실험을 한 번 해보자.
우리 회사는 8시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시간에 전화가 오거나 업무 요청이 올 일도 많지 않다. 팀장님께 허락도 받았으니 출근하고 30분간은 가능하면 공부 등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자. 그리고 5시에 퇴근하고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이른 시간에 저녁을 먹고 운동을 가고, 공부를 한다면 저녁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까? 혹 곧바로 퇴근하지 않는다면 클라이밍 센터를 다니던 다시 시작할까 말까 망설였던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하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것 같다.
생각으로 정제되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말과 입 밖으로 나와 누군가와 얽혀버린 말의 위력은 다르다. 주 35시간제 근무라는 원했던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방식의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생각했던 걸 말로 꺼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고, 그중에 일부를 말로 표현하고 또 그중에 일부를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니까 내가 최종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내 생각 중에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런 나에게 이런 일은 꽤나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다음 달부터 8시에 출근한다.
'팀장님께 폭탄발언 : 저 주 35시간제 할래요(4)'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