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이야기 (2)

2023년 국제 여성의 날 일기

by 세니seny

내가 10년도 더 전에 다녔던 나의 첫 번째 회사는 내가 다닌 곳 중 규모가 가장 컸다. 전체 인원이 1000명이 넘었고 계열사도 있었다. 글로벌 기업이어서 그런지 그때부터 여성의 날과 관련된 행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누구나 아는 흔한 용어가 되었지만 내가 ‘work & life balance’라는 개념을 처음 들은 건 이 회사에 다녔을 때였다. 행사가 잘 실행이 되고 말고는 별개로 두더라도 큰 규모의 회사를 다니니 이런 개념을 남들보다 빠르게 실제로 접할 수(나마) 있었다. 그래서 노비를 해도 대감집에서 하라는 게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인 거 같다.


전에 그 회사 다닐 땐 국제여성의 날이라고 회사에서 책도 나눠주고 그랬었는데. 어쨌거나 대기업이나 글로벌 기업은 겉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하므로 실제로 개선이 안 되더라도 그런 행사를 하는 척이라도 한다.


그러고 보니 작년 3월이었나, 여성의 날은 아니었는데 아마 화이트데이 즈음이니 3월은 맞는 것 같다. 남성분이신 대표이사님께서 여직원들에게 쿠키를 선물하셨다. 설마 대표님이 직접 사 오신 건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인사팀 여직원을 시켜서 여직원들에게 나눠줄 쿠키를 사 오라고 시키신 거다. 어쨌든 대표님께서 이런 적은 처음이라 영문도 모르고 받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날도 흐리고 비까지 와서 밖으로 돌아다니기 좋지 않은 날씨였다. 그런데 대기업처럼 여성의 날 같은 행사를 매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표님 마음에 따라 갑자기 '여직원들 주게 초콜릿 같은 거 사 오라'라고 한 마디 하셨을 테지. 그리고 그 말은 인사팀에서 연차가 가장 낮은 직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겠지. 그러니 그 직원도 뭐라 못하고 갑자기 사러 나갔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직원은 1월에 퇴사한 직원 자리에 급하게 뽑혀서 들어온 직원이었다. 원래 성격이 그런지 전 직장에서 무슨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도 팀 직원들 외에 다른 사람들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뭐 나도 그런 편이라 개의치 않았다. 아직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기도 했고 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잘 어울리는 경우도 많이 봤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출근을 안 하는 것 같길래 물어보니 코로나에 걸려서 재택근무를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3월 말이 되고…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그만두기로 했다고 하더라.


아주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팀 내 평가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던 모양. 그러니까 스스로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둔 게 아니라 윗사람들의 평가가 좋지 않아서 그만두게 된 거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사람들한테 정식으로 퇴사한다고 인사도 하지 못하고 4월 초, 서류 절차 등 정리할 게 있어서 출근했다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퇴사하며 회사에서 사라졌다.


화이트 데이랍시고 대표님이 시켜서 쿠키 사다가 대표님 대신 여직원들한테 돌렸는데 자기는 얼마 못 가 회사와 근로계약을 종료하는 상황. 나는 그녀가 비 오는 날 나가서 쿠키까지 사 온 게 안쓰러워서 (심지어 자기도 여성인데) 고맙다는 말을 따로 하려고 했었는데 그 말도 못 하고 말았다.


올해는 대표님이 그런 지시를 안 하시는 거 보니 작년엔 즉흥적으로 하신 거 같다. 우리 회사도 원래 남직원이 많은 편이었는데 내가 재직하고 있는 동안 여직원 비율이 조금조금 늘기 시작했다.

원래 업무 특성상 남자만 있는 팀도 있었는데 요즘엔 웬만한 팀에는 여직원들도 한 명씩 들어가 있다. 남성으로 이루어진 팀 틈바구니에서 잘 적응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아무래도 업계 특성 때문인지 후자가 많은 것 같다.


모임이 끝나고 헤어져서 집에 오는 길. 아까 술자리에서 오늘이 국제 여성의 날이라고 했지? 나는 국제 여성의 날에 뭘 했나?


평상시와 똑같이 일하고 퇴근 후에 보라색 표지를 가진 책을 보랏빛을 띠는 음료를 마시며 읽었다. 여성의 날을 상징하는 색 중 하나가 보라색인데 그러고 보면 책의 표지 색깔이 의도적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모임을 거창하게 여성들의 연대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10년 이상 사회생활을 하고 있고 자기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신 여성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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