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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Apr 08. 2022

한 달 간격의 부고 : 친할머니와의 이별

외할머니 부고 이후 한 달만에 들려온 친할머니의 소식

(2017년 2월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한 달 간격의 부고 : 외할머니와의 이별'에서 연결됩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가량이 지났다.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어느 정도 슬픔을 극복하고 그럭저럭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른 지역에서 일하던 아빠한테 전화가 온 것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주중엔 회사를 다니고 매주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하는 학원에 다녔기 때문에 월~금 포함 주 6일을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그래서 나에게 늦잠을 잘 수 있는 건 오직 일요일 뿐이었기에 예외 없이 일요일 아침에는 늦잠을 잤다.


     보통 아빠한테서 온 전화는 분명 안방에 있는 엄마가 전화를 안 받거나 카톡을 안 읽어서 나한테 대신 물어보려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대개 중요한 일이라기보다는 엄마랑 전화가 안 되니까 엄마 집에 있냐? 뭐하냐?를 물어보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였고 이 달콤한 잠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전화가 온 걸 알면서도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잠이 스르륵 들고 있는데 전화가 또 왔다. 받아야 되나, 하다가 잠의 무거움에 눌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엄마가 안방에서 건너와서는 아빠의 엄마 그러니까 나에게는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 보니 아빠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2 통과 카톡 메시지 2개가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친할머니와는 왕래가 없었고 특히 최근 몇 년간은 아빠도 아예 자신의 아버지 제사도 가지 않아서 우리 집은 친가와 교류가 없었다. 그래도 별달리 아프신 데는 없다고 들어서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우리는 친할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 자세한 연유도 모른 채 갑자기 분주해져서 옷을 챙겨 입고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아빠는 다른 지역에서 급히 오게 되었다. 아빠를 기다렸다가 같이 가려고 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오는 아빠를 기다리면 너무 늦겠다 싶어 먼저 출발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그나마 낯익은 얼굴인 큰아빠와 큰엄마가 보였다. 사촌오빠는 너무 오랜만에 봐선지 얼굴을 못 알아봤다. 사촌 여동생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고 사촌오빠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즉 큰아빠, 큰엄마의 며느리도 있었다. 고모들도 두 분 계셨는데 너무 오랜만에 봐서 솔직히 고모 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게, 고모의 얼굴이 큰아빠 얼굴과 너무 닮아서 저 사람들이 고모인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우리는 교류가 없었던지라 서로 데면데면했다. 그나마 막내 고모가 엄마랑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어른들의 사정이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과거부터 형제들 사이에 돈 문제 등이 얽혀 있었고 최근 한 3,4년간은 형제들끼리도 교류가 거의 없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다들 갑자기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 것 같았다. 저녁때에는 외할머니의 장례 이후 한 달 만에 보는 엄마의 외가댁 식구들이 장례식장에 다녀갔다.


     다음날인 월요일, 나는 출근을 하고 엄마는 다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발인이 내일이라 나는 오늘은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장례식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발인날 아침 6시에는 도착해야 한다고 해서 오늘 저녁에 가기로 했다. 퇴근길에 엄마와 통화하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왔다. 씻고 저녁을 먹고 나가기로 했다. 3분 카레를 데워서 밥을 슥슥 비벼서 먹고, 사과와 한라봉과 삶은 양상추를 그릇에 담고 마요네즈를 뿌려 후식까지 알차게 먹었다.


     엄마가 가져다 달라고 한 것들을 챙겨 짐을 싸고 저녁 여덟 시 반이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적당히 배가 불렀고, 민낯에 크림을 잔뜩 바른 얼굴에 2월 초의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일주일을 시작하는 피곤한 월요일 게다가 이런 어둑어둑한 밤에 어딘가 목적지를 두고 길을 나서는 것은 나에겐 참 드문 일이다. 장례식장은 같은 서울에 있었지만 우리 집과 정반대 편에 위치하고 있어서 먼 여정이 될 터였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지하철역을 지나 헬스장에 가는데 오늘은 그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 지하철을 탔다. 나에겐 두 분의 할머니가 계셨고 똑같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데 지난달과 다르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는 같은 할머니이지만 나와 친할머니 둘 사이 혹은 우리 가족과 공유한 이야깃거리가 없고 그동안 좋은 얘길 들은 게 없어서인지 비교적 덤덤했다. 그냥 어느 서울 하늘 아래 계시겠거니 생각만 했지.


     어제 갔던 장례식장에 다시 도착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보내준 화환이 보였다. 저녁 때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던데 내가 도착하니 이미 10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라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그런지 조용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이를 닦고 한쪽에 위치한 유가족 방에 누웠다. 그나마도 남아있던 조문객들도 하나둘 모두 돌아가고 나니 남은 가족들이 모여 옛날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서 OO동이 어쩌고 QQ동이 어쩌고 옛날에 누가 어쨌고 저쨌고... 술도 한 잔씩 하신 데다 손님도 없으니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 가운데 엄마랑 나는 조용조용 두어 시간 떠들다가 어렴풋이 잠에 들었다.


     셋째 날은 발인이었다. 생전에 할머니가 성당에 다니셔서 성당식 장례가 진행되었다. 결혼식도 성당에서 진행하는 건 이것저것 절차가 많다고 들었는데 장례도 마찬가지인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침 여섯 시부터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제를 올리는 것처럼 출관 예배를 드렸는데 성수 뿌리는 방법을 잘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내 순서가 넘어가버렸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영정사진을 들고 내려가 관을 차에 실었다. 그리고 성당에 가서 다시 관을 꺼내서 홀에서 예배를 지내고(일반 신도분들이 와서 봉사활동을 하시는 거 같았다) 다시 차로 모셨다. 그리고 화장터로 출발했다.


     화장장을 12시로 예약했는데 일찍 도착해서 그 김에 아침 겸 점심으로 설렁탕을 먹었다. 그리고 승화원에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어 다시 밖으로 나가 관을 모시고 정해진 화로로 갔다. 지난달에 외할머니 장례에서 봤던 것처럼 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2층의 유가족 대기실에서 다시 한번 봉사자 분들이 노래를 불러주셨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앉아 있다가 방에 있는 모니터에 뜬 ‘냉각 중’이라는 문구를 보고 다들 아래로 내려갔다.


     한참을 기다리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난달과는 다르게 유리 너머로 직접 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걸 쓸어서 담았다. 그리고 고인을 받는 곳으로 가니 재를 수습해서 담는 모습까지 전부 보여주었고 할머니는 나무상자에 담겨 나왔다. 태울 때 관이랑 기타 등등 태워서 이 정도 나오는데 진짜 순수하게 사람만 태운다면 이보다 가루가 훨씬 적게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친할머니는 별도로 승화원에 모시지 않고 자연으로 보내드리기로 했다. 그래서 나무상자를 들고 건물 바깥의 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봉안당에 유골을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 데나 유골을 뿌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라고 했다. 그곳엔 준비된 항아리가 있었고 예를 치르고 항아리에 옮겨 담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다들 나와서 나무 상자에 손을 한 번씩 대고 다시 돌아가면서 재를 한 줌씩 쥐어 항아리에 옮겨 담았다. 그러고 나니 끝이었다. 외할머니는 보고 싶으면 승화원에 가서 정해진 자리를 찾아가면 그래도 만날 수 있는데 친할머니는 이제 진짜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아빠는 지난달에 있었던 외할머니 장례보다 많이 울지 않았다. 그건 최대한 좋은 관계로 지냈던 장모님보다 아마 좀 더 복잡한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엄마였기 때문에 그랬을까? 외할머니인 장모님과는 겉으로 드러나는 트러블은 없었으므로 애틋함만 남았을 텐데 친엄마인 나의 친할머니와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그래서 더 복잡한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다시 차를 타고 나와 장례식장에 도착함으로써 공식적인 장례 절차가 끝났다.


     원래 이런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식구들끼리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할 텐데,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우리 친가 식구들과 큰아빠 내외는 장례식장 앞에서 그대로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갔다.


      무시무시한 말 같지만 이제 또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지 않는 이상, 이들은 만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집과 비슷한 방향에 사시는 큰고모 내외를 태우고 같이 왔는데 다들 서운한 것도 있고 하니 엄마가 다음에 밥이나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다들 만나자고 해도 제대로 풀지 않았던 과거의 문제들과 형제 관계의 오랜 습성에 의해 한두 번 만나고 나면 결국 발길이 뜸해질 것이다.




     한 달 사이에 직계 가족의 부고를 두 건이나 들었다. 한 세대가 이렇게 서서히 저물어간다.


     난 종교가 없다. 종교에서는 내세가 있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내가 한 달 동안 두 번의 장례 과정을 보면서 느낀 건 숨이 끊어지니까 몸도 그냥 차가울 뿐이고 형체가 있었던 사람도 한 줌 재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더 이상 현실 세계에 실체가 존재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을 알던 사람들 마음속에 남을 뿐.


     그래서 살아있을 때 후회 없이 잘하고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것들은 해보고, 할 수 없는 것들도 시도는 해 볼 수도 있는 거고. 서로 미워하지 말고 즐겁게, 즐겁게 살아야지.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느끼고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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