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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un 25. 2022

해가 뜨는 풍경을 비춰주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여행지에서 보는 노을, 멍 때리는 시간의 필요성

(2021년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5월의 마지막 날, 오전에 막내 사원과 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팀장님께도 일단은 막내가 당장 그만둔다고는 하지 않는다는 업데이트된 소식만 간단히 말씀드렸을 뿐, 자초지종을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퇴근시간이 다 되자 팀장님께서 저녁 먹으러 갈 거냐고 물어보신다. 


     내 멋대로의 추측으로는, 오늘 막내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한 것을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하자는 의도가 있으신 것 같았다. 게다가 마침 나도 이따 저녁 8시 20분에 5월까지만 볼 수 있는 그래서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꼭 봐야 하는, 코엑스 전광판에 뜨는 데이비드 호크니 영상을 보려면 어디선가 저녁을 먹긴 먹어야 해서 모르는 척하고 팀장님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제주향이 물씬 풍기는 듯한 고등어를 주문하고-하지만 고등어는 노르웨이산이었단 거 ㅎㅎ-식사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다. 걱정이 많았던 나와는 달리 동료와 팀장님께선 막내는 분명 감정에 휩쓸려서 그랬을 거라며 덜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난 내 기준에서 그만둔다는 말을 내뱉는 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라면 진짜로 그만두려고 말하는 거니까 심각하게 생각했었다. 


     난 사실 동료가 막내 사원이 그만두고 싶다고 한 그 말은 굳이 팀장님한테 전달하지 않았어도 될 말이라고 생각했다. 막내가 실제로도 팀장님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말을 전달하지 않았으면 그것에 대한 결과를 알려줄 필요도 없는데 그 말을 전달해버렸으니 그에 대한 결과와 변화도 알려 드리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되어서 말씀드렸다. 이 상황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현재 벌어진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코엑스 전광판에서 5월 한 달 내내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이패드로 그린 영상이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 영상을 보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나는 8-5시 출퇴근제를 하고 있어서 야근하는 날이 아닌 이상 저녁 8시 넘어서 회사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오늘은 야근은 안 했지만 어느새 5월의 마지막 날이었고 큰 전광판으로 그 영상을 볼 기회는 오늘뿐이었다.

  

     코엑스 전광판엔 주로 광고가 많이 나오지만 간혹 이런 예술적인 영상이나 자연 풍경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광고 영상 보단 이런 게 훨씬 좋았다. 여긴 분명 도심 한복판인데도 전광판을 통해 나무가 우거진 숲 한가운데에 서 있기도 했고, 심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내심 그런 영상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랐다.


     여행지에 가면 멍하니 서서 하늘만을 바라보거나 해가 떨어지는 혹은 떠오르는 시간을 기다린다. 그 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다. 쉽게 말해 멍을 때린다고 보면 된다. 오로지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한 일념으로 시간을 보내는 시간.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가지 못했으니 그간 그럴 일이 없었다. 그런 기회가, 이런 시간이 소중했다.


     사무실에서 퇴근하기 전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컴퓨터로도 그 영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전광판으로 보는 건 느낌이 다르다. 저녁을 잘 먹었으니 배도 부르고 소화도 시킬 겸 다이소에 들러 뭘 좀 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바로 전광판 아래서 보는 것보다는 건너편에서 보는 게 더 잘 보일 거 같았다. 영상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해 서서 기다린다. 

 


'Remember that you cannot look at the sun or death for very long' by 데이비드 호크니 (@코엑스, 2021.05.31)



     오후 8시 21분을 24시간 표기법으로 표시하면 20:21이 되고 마침 지금이 2021년이니까 이 시간에 맞춰 영상 재생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본 거 같다. 이 영상이 나오고 있는 이곳 서울은, 해가 완전히 져버린 컴컴한 밤이다. 밤의 한가운데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는 영상을 보고 있자니 어색하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여행지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저 멍-때리며 화면에만 집중했다.


     영상은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래도 두 번이나 틀어줬다. 영국의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로스앤젤레스에서, 도쿄에서, 뉴욕에서 같은 영상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곳들에 짧게나마 다녀오는 느낌이 들었다. 영상을 다 본 뒤, 바로 근처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노래를 듣고 싶어서 페퍼톤스 노래를 재생했다. 페퍼톤스의 노래는 맑고 밝은 낮의 청량함에 어울리는 곡도 있고 여행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혹은 공항으로 가는 길에 잘 어울리는 곡들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1집 후반부에 실린 곡들은 하루 여행을 마무리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듣기에 제격이라고 지정해놓았다. 그래서 그 노래들을 들으며 집으로 향하니 꼭 여행지에서 해가 지는 풍경을 보고 그날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밤 9시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이 길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택시 기사들이 줄지어 서있는 인도변 옆에 혼자 서서 전광판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멍하게 영상이 나오길 기다리던 시간은 마치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노을을 기다릴 때의 기분과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영상이 나왔을 때는 힘들었던 오늘 하루를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걸로 2021년의 5월의 마지막 날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5월의 끝자락에 서서, 백전노장은 최신 문물인 아이패드로 작업해서 전 세계에 영상을 띄우는데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같은 자기반성과 작품을 보면서 상상 속의 여행지에 다녀오고 그동안 다녀왔던 곳들을 떠올렸다. 길고 길 것만 같았던 5월도 끝이 났다. 그리고 제목처럼 6월의 노래인 나루의 <June Song>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월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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