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하면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외할머니
(글의 시점이 2021년에서 시작해 2017년으로 이동합니다.)
팀장님은 본인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가감 없이 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남들에게 좋게 비칠지, 나쁘게 비칠지 대체로 상관하지 않고 일단 모든 걸 다 내뱉는 타입이랄까.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것까지도 의도해서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팀장님의 친할머니가 엄마를 대신해서 자신을 키워주었기 때문에 팀장님과 아주 각별한 사이라는 걸 팀장님께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팀장님이 명절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혼을 해서 처가도 있고 아내와 아이들도 있으니 자주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을 온전히 이루기 어렵다는 말을 하셨을 때도 그게 어떤 감정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은 월 마감도 끝났고 금요일이라 주말을 앞두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운 아침, 팀원들과 커피를 한잔씩 사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사이 팀장님은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계셨는데 나를 부르셨다. 그런데 집에 일이 생겨서 이거 하나만 하고 가봐야 하니 대신 오늘까지 보내야 하는 자료를 나보고 OO씨한테 보내달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아이, 그거 팀장님이 보내시는 거잖아요’라고 했을 텐데 그 말을 하는 팀장님 눈이 새빨개져 있었다. 집에 일이 생겼다는 걸 보니 역시 아이들이 아픈 건가? 그래서 별말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른 팀 팀원에게서 카톡이 와있었다. 팀장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으셔서 그런 거니 이해하라고. 그 순간 모든 상황이 단박에 이해되었다. 자신의 엄마와도 같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바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지도 못하고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당장 급하게 메일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평소와 같이 의례적인 인사로 ‘have a nice weekend’라고 인사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3일장을 치른다면 일요일이 발인이다. 그러니 팀장님에겐 결코 nice weekend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2017년 초, 꼭 겨울 이맘때에 한 달 간격으로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이하 할머니)와 친할머니가 떠올랐다.
2016년의 크리스마스 날, 중환자실에 입원한 할머니를 뵈러 부모님의 고향 도시에 다녀왔다. 당일치기로 다녀와야 해서 새벽 4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거의 4시가 다 되기 전까지 깨어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5시가 넘었다. 깜짝 놀라 안방에 가서 엄마를 깨우고 엄마는 동생을 깨우고 급하게 부랴부랴 짐을 싸서 차를 타고 출발했다.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았고 아직도 주위는 어두웠다. 한참을 가도 어둠이 이어졌다. 어느 정도 가니 잠이 조금씩 와서 잠깐 졸았는데 그 사이에 어둠이 걷히고 주위가 밝아져 오고 있었다. 수요일에 할머니의 입원 소식을 듣고 주말에 가볼까 생각했었지만 면회 시간이 아침과 저녁밖에 없는지라 기차를 타고 간다면 당일치기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평일에 이미 다녀온 엄마한테 또 가자고 하기는 미안해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너희들 얼굴 보여드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먼저 말을 꺼내 주셨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할머니를 뵌 게 작년 8월 여름휴가 차 다른 곳에 가던 길에 잠시 들렀던 것으로, 벌써 1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할머니가 입원하신 병원에 도착하니 아침 8시였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차에 앉아 귤을 까먹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지역에서 출발해서 어제 미리 와있던 아빠한테도 도착했다고 연락하고 병원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면회 시간인 9시가 다 되어 주차장으로 차 한 대가 들어왔고, 그것은 큰외삼촌 내외의 차였다. 그 차에서 아빠와 외할아버지가 함께 내리셨다.
우리는 다 같이 3층 중환자실 병동으로 올라갔다. 병실 앞 복도는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엄마의 사촌인 OO이모는 우리보다 먼저 와 계셨다. 면회시간이 되자 문이 열리고 그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가 손 소독제로 손을 소독하고 마스크를 끼고 각자 면회를 온 사람들을 찾아 제 자리를 찾아갔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본 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환자들이 많았고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만큼 중환자가 많다는 것일까. 다른 환자들도 각자 다른 호스나 기계장치를 달고 있었다. 할머니는 다행히 어제저녁보다 자가 호흡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수치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 수치가 100 정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엄마는 계속 100점이라며 할머니를 칭찬해주었다. 나와 동생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손을 붙잡고 주물러 드렸다.
조금 있다가 둘째 외삼촌과 외숙모도 오셨다. 할머니는 입에 호스 같은걸 끼고 계셔서 말은 못 했지만 귀에는 장치를 안 해서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엄마가 자신의 엄마에게 '내 말 들려? 눈 깜빡여봐' 하면 바로 눈을 깜박이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다리를 계속 주물렀고 우리 엄마가 나에게는 할머니인 자신의 엄마에게 '엄마, 아빠가 다리 너무 세게 주무르지 않아?' 그랬더니 아니라는 표시로 고개를 좌우로 흔드시기까지 했다.
혹시 손을 움직여서 장치들을 건들까 봐 양쪽 손목 위에 세게 천 같은 걸로 묶어놨는데 그것 때문에 피가 잘 안 통해서 양손이 퉁퉁 부으셨다. 엄마 말대로 그래도 주물러 드리니까 부기가 조금 빠지는 느낌이었다. 면회시간은 아침 30분, 저녁 30분으로 정해져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직원이 면회 시간이 종료되었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께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하고 눈을 마주치는데 할머니가 입을 막 움직이시려고 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몇 번을 또 올게요, 또 올게요 하고 하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엄마와 사촌 지간인 OO이모는 직계 가족들끼리만 있으라고 자리를 비켜준답시고 아까 할머니만 잠깐 보고 나간 모양이었는데 복도 밖 의자에 앉아 울고 있었다. 엄마는 휴지를 찾아 이모에게 건넸다.
병원을 나온 우리는 콩나물국밥 가게에 가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국밥을 한 그릇씩 먹으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고 헤어졌다. 나와 엄마와 동생은 서울로, 아빠는 일하고 있는 다른 도시로, 할아버지는 일터로, 나머지는 각자의 집으로.
2012년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제주도에 여행을 갔을 때만 해도, 2013년에 경주와 부산을 같이 여행할 때만 해도 할머니는 치매 초기라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지만 그 외엔 걸음만 조금 불편하신 정도였다. 2014년 8월,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려지셔서 그때 할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할머니와 나랑 둘만 잠깐 병실에 같이 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1분도 안 되어 방금 전에 물어봤던 걸 똑같이 물어보시고, 또 물어보기를 반복했다. 그때는 나를 알아보셨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그러고 나서 1년 뒤인 2015년 8월,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가서 뵈었을 때는 이제 내가 누군지 잘 기억을 못 하셨다는 거다. '당신의 딸의 딸이에요'라고 알려드렸다. 그렇지만 그런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내가 당신 딸이네, 아들이네 하는 것-도 환자에게는 스트레스라고 해서 조용히 손을 잡아 드리고 가져간 사과를 먹여드리는 것으로 내가 누군지 알려주는 것을 대신했다. 할머니는 점점 말수를 잃어갔고 병원에 누워만 계시다 보니 컨디션은 서서히 나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매일매일 병원에 들렀다.
한 세대를 살아온 불꽃이 아주 희미하게 그 불을 반짝이고 있다. 사그라드는 불을 다음 촛불에 나누어주면 다시 불이 살아나고 또 그 불을 다시 다음 촛불에 나누어주면 또 불이 살아난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온 게 아닐까. 조그마한 입을 움직이던 할머니의 모습이 뇌리에 박힌다. 할머니, 조금만 더 힘내요. 100점에다가 보너스 점수 더 받으셔야죠? 그래서 호흡장치를 떼고 숨을 쉬게 되면 오늘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그냥 무슨 말이든 좋으니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에게 목소릴 들려줘요. 그것이 단지 '응'일지라도.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지 2주가량이 지났다. 그동안 호전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저께 병원에 갔다 어제 서울로 돌아온 엄마의 이야기를 채 다 듣기도 전에 병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니 가족들이 와야겠다고. 엄마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엄마가 다시 병원에 갔을 때는 상태가 또 괜찮아지셨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예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제 헤어질 시간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계속 불안했다. 끊임없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회사에서 더 해놓고 가야 할 업무는 없는지 이것저것 챙겼다.
그러다 서고에 들어가기 위해서 키를 꽂고 돌리는 그 순간, 몸이 부르르 떨리는 듯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사무실 내에 따로 분리되어 있는 서고는 냉방장치가 없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쌀쌀하다. 그 온도 차이 때문에 몸이 떨렸을 거라 생각했다. 서고에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엄마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할머니 가셨다.
몸이 덜덜덜 떨렸던 싸한 느낌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때였을까? 이럴 거면 어차피 경조휴가도 3일 나오는데 오늘 내려가서 한 번이라도 더 얼굴 보여드릴 걸. ‘했으면 좋았을걸', '좋았을 텐데’라는 말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걸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니까. 결국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만난 건 지난 크리스마스가 마지막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카톡을 보자마자 엄마한테 전화를 하니 목소리가 잠겨있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 결과 지금 퇴근하고 내려가도 밤이고 시간도 늦어져서 내일 아침에 내려가기로 했다. 아마 오늘은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니 오늘이 소한小寒이었다.
할머니,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그동안 얼마나 답답하셨어요.
입에는 호스 꽂아놓고, 손도 묶어놓고, 계속 누워있어야 해서 더 답답하셨죠?
그리고 자꾸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이 찾아와 아들 입네, 딸입네, 남편 입네 하고 얼마나 정신없으셨겠어요.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 놀러가면 손을 꼭 잡고 근처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사 주시던 기억과
할머니에게서 나던 특유의 냄새 또 항상 양말과 속옷을 잔뜩 사서 안겨 주셨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있어 제가 이렇게 숨 쉬고 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