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걷고 그에 대한 글을 쓰려하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월에 어느 길을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동안 걸었던 길에 대해서, 그 길에서 봤던 것 그리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쓰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고 난 직후여서 그런지 6월의 김영하 북클럽 책이었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도, 글쓰기 작법을 위해 빌려온 '너도 작가가 될 수 있어'라는 책에서도, 맨즈플레인(mansplain)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사실은 아니라고 한다-리베카 솔닛의 유명한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도 '걷기'라는 행동과 '글쓰기'라는 행동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장 자크 루소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철학자, 소설가, 작곡가, 에세이 작가, 식물학자였고, 독학자, 도망자, 정치이론가, 마조히스트였다. 무엇보다 루소는 산책자였다. 그는 자주 걸었고, 혼자서 걸었다. 물론 걷기 모임에서처럼 가까운 친구와 걷는 데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떠나고 돌아올 자유, 이리저리 거닐 자유,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처럼 "변덕이 이끄는 대로 이 길 저 길을 따라갈 자유."
걸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우리 머릿속은 바쁘다. 눈앞의 지형에 집중하고 주변 풍경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아무런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거닐며 변덕을 따라갈 여유는 충분히 남아있다.
그토록 많은 철학자들이 걷기를 즐겼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아고라를 거니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좋아했다. 니체는 "진정으로 위대한 생각은 전부 걷기에서 나온다"라고 확신하며 종종 기운차게 스위스 알프스 산맥으로 두 시간가량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중략)
칸트는 매일 오후 12시 45분에 점심을 먹고 프러시아 쾨니히스베르크의 늘 똑같은 대로에서 한 시간(더도 덜도 아닌 딱 한 시간) 동안 산책을 했다. 칸트의 산책 시간이 어찌나 한결같았는지 쾨니히스베르크 주민들은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자기 집 시계를 맞췄다.
루소는 철학의 가장 큰 통념 중 하나가 거짓임을 잘 보여준다. 바로, 정신 활동은 신체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통념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3장 루소처럼 걷기 중
Day 5 '글쓰기 전에 걸어봐'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 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중
출근 준비를 부지런히 해서 평소보다 20분 정도만 일찍 출발하면 여유가 생겼습니다. 자동차와 건물은 없고 나무와 꽃, 사람뿐인 공원이라 사진 찍을 거리가 많았죠. 어떤 날엔 벤치에 앉아 분위기 잡으며 책을 읽기도 했고요. 글도 썼습니다. (중략)
점심시간에도 식사만 빠르게 하고 산책하러 나가곤 했는데요.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주변 경관이 보이는 겁니다. 꽃이 피고 지고 바람이 불다가 그치는 걸 매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점심엔 파랗던 하늘이 퇴근길엔 노을이 지고 야근할 때면 달과 별일 떴어요.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달과 별이 글을 써 주더라고요. 두 발로 걷고 또 걷다가 멈춰서 '멍 때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글감이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만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감성이 폭발하던 그때, 카카오 브런치나 페이스북 등에 글을 매일같이 올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당장 출퇴근길을 바꾸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쉬는 날 밖으로 나가 걸어 보는 건 꼭 해 보길 바랍니다. 수첩 하나 들고 가도 좋고, 스마트폰과 보조배터리만 가지고 가볍게 산책을 가도 좋겠습니다. 글쓰기 전 걷기, 꼭 해 보세요. 글은 어쩌면 글 위에서부터 시작되고, 책상 앞에서 비로소 마무리되는 거니까요.
<너도 작가가 될 수 있어>, 이동영 지금, Day 5 중
걸으면서 말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맞아떨어졌다는 키츠의 일화를 보면, 슬렁슬렁 거니는 산책이 상상력을 거닐게 하고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이해는 그 자체로 창조활동이다. 성찰을 야외활동으로 바꿔놓는 활동이다. 울프는 회고록 <과거의 스케치(A Sketch of the Past)>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던 어느 날 태비스톡 광장을 거닐다가, 나는 다른 책을 쓸 때도 가끔 그랬던 것처럼 머릿속에서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써 내려갔다. 나로서도 부지불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한 생각이 곧장 다음 생각으로 이어졌다. 빨대로 거품 방울을 불면 머릿속에서 발상들과 장면들이 쏜살같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인데, 그 때문에 길을 걷는 내 입술이 저절로 읊조리는 듯했다. 무엇이 거품 방울을 불어냈을까? 왜 하필 그때였을까? 나는 모른다." (중략) 울프는 정신과 다리가 둘 다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배회하는 산책을 유용하게 활용했을 뿐 아니라 글에서도 칭송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6장 울프의 어둠 중
앞으로 써나갈 이야기는 혼자 걸었던 길에 관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에는 주위를 온전히 둘러보거나 생각할 새가 없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있어 대화 내용에 집중하거나 상대방에게 신경이 쏠려있기 때문에 내가 걷고 있는 그 길은 배경에 불과하다. 그때는 걷기가 아닌 그 순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혼자 걸고 있으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실시간으로 포착된다. 높은 건물들, 건물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각종 간판,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도심 한가운에서 초록빛을 뿜어내고 있는 나무, 빗방울을 머금고 화단에 심어져 있는 꽃, 빵빵대는 클락숀 소리와 함께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차량까지. 그리고 과거에 왔던 장소였을 경우 당시의 추억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 장소와는 상관없이 최근에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며 걷고 있는 그 시간을 가득 채운다.
내가 그동안 걸었던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갈 길은 특별한 길이나 대단한 산책로가 아니다. 이동영 작가처럼 출근길 혹은 퇴근길에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걷거나 어딘가를 이동할 때 버스나 지하철 대신 걷기를 택한 것 그 정도의 길일뿐이다. 그래도 내 의지로 선택한 산책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앞으로 생각날 때마다 내가 걸었던 길(코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곳에서 본 것, 생각한 것, 느낀 것에 대해 적어나가고자 한다. 많은 철학자들도 걷기를 선호했다고 하니 걸으며 개똥철학이나마 나의 철학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버지니아 울프처럼 엄청난 생각들이 나를 뒤덮어 갑자기 창조활동에 불이 붙을지도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