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로 지나다니기만 하던 곳을 걸어보기
올해 1월부터 김영하 작가님이 운영하는 북클럽(관련 글 : https://brunch.co.kr/@lifewanderer/86)에 참여하고 있다. 책을 안 읽어도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에는 참여가 가능하다. 하지만 한 달에 한 권이니 부담스러운 양도 아니고, 라이브 방송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듣고 느끼고 답하려면 아무래도 책을 읽는 것이 좋기 때문에 매월 정해지는 북클럽 선정도서를 읽어왔다.
7월의 책으로는 마쓰이에 마사시라는 일본 작가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이 선정되었다. 동네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검색해봤지만 이미 누군가가 대여한 데다 심지어 예약까지 두세 명씩 걸려있었다. 나는 책이 차지하는 부피 때문에 웬만하면 책을 사지 않고 주로 빌려서 읽고 있으며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전자책을 구매해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도서관 홈페이지 검색창에는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만 체크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혹시 몰라 관내에 있는 모든 도서관을 체크해놓고 다시 검색하니 꽤 많은 곳에 이 책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큰 도서관에선 죄다 대출 중이거나 예약이 걸려 있었고, 작은 도서관에는 아직 몇 군데 남아 있었다. 그래, 다음 주 월요일에 퇴근하고 작은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작은 도서관은 평일에만 운영하고 운영시간이 오전 9시에서 저녁 6시까지였다. 나는 8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는지라 5시에 곧바로 퇴근해서 이동해야 6시 안에 도서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까지 월 마감이 끝나야 하기에 조금 분주했지만 오늘은 꼭 5시에 퇴근해야 한다고 동료를 채근해서 자료를 빨리 받았고, 마감 자료를 완성해 팀장님께 전송했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오늘은 나 약속 있어요' 하는 듯한 짧고 딱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나온 데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꼭 5시에 사무실에서 나가야 한다고 선포하니 팀장님이 오늘 약속 있는가 봐? 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걸어오신다.
며칠 전,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사내연애를 했던 우리 팀 동료(하지만 대부분의 사내연애가 그렇듯 그들의 연애 초창기부터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가 드디어 본부장님께 결혼 소식을 전달했고 그 소식이 대표이사님 귀에까지 들어가서 오늘 그 커플과 대표이사님, 본부장님이 점심식사를 하고 온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팀장님은 나에게도 뭐 좋은 소식이 없냐며 슬쩍 떠보신다.
미안해요, 팀장님. 팀장님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소식은 당분간 충족시켜 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어딜 가는지 혹 누굴 만나는지 궁금해하는 팀장님과 팀원들의 관심 어린 눈길을 뒤로하고는 전 북클럽에서 읽을 책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혼자 되뇌며 큭큭거렸다. 그래서 나는 굳이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가요'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팀원들이 약간 궁금해할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그 편이 더 재밌으니까.
내가 가려는 반포본동 작은 도서관은 9호선 구반포역 바로 근처에 있었다. 책이 남아있는 작은 도서관은 몇 군데 더 있었지만 교통편이 가장 좋은 곳이 이곳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는데 익숙한 풍경이다. 아, 이곳은 내가 2013년 9월 ~ 2015년 9월까지 2년간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지나다니던 그 길이었다. 출근길에 이 구간을 지날 때는 거의 아니 항상 졸고 있었고 퇴근길에는 멍하니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바깥 풍경을 봤던 그 길이었다.
구반포역 근처는 낮은 상가들이 길 양 옆을 감싸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기서부터가 강남으로 들어서는 초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강남이라고 하면 흔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높은 건물이 나를 압도하는 게 아니라 클래식하고 낮은, 70년대쯤 건축되었을 오래된 상가 건물과 거리가 펼쳐지기에 거부감이 들지 않고 정겨운 느낌마저 든다.
반포본동 작은 도서관은 주민센터 건물 2층에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주로 동네의 큰 도서관만 가다 보니 작은 도서관은 거의 처음 와보는데 보고 있자니 옛날 만화방이 떠올랐다. 서가도 아기자기하고 요즘 스타일은 아닌 듯한 책꽂이들이 도서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리 책의 청구기호를 찾아왔기에 그쪽 서가에 가서 책을 찾는데 번호대로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있지는 않아서인지 책을 찾느라 애를 좀 먹었다.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길래 책의 청구기호 830마 항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참을 눈으로 훑고 나서야 찾던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대출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돌아가기로 한다. 버스정류장까지 아주 멀지 않아 상가를 따라 걷는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주공아파트가 많던 그 동네를 걷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고 몇 년 전 출퇴근길에 버스로만 다녔던, 내가 전혀 걸어보리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길을 지금 이렇게 걷고 있어서 신기했다.
지도를 보니 동작역이 근처에 있고 한강이 그리 멀지 않았다. 책을 반납하러 갈 때는 그쪽으로 한번 가볼까? 아님 한 정거장 정도 돼 보이는 고속터미널 쪽으로 한 번 걸어가 볼까? 오늘도 이렇게 새로운 걷기 코스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