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걷기 (2) : 테헤란로 걷기

그냥 좀 걷고 싶어서 눈앞에 보이는 길을 걸었다

by 세니seny

우리 회사는 삼성역 근처 테헤란로에 위치해있다. '테헤란'은 이란의 수도로 1977년 서울특별시와 테헤란이 자매결연을 맺었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서울에는 '테헤란로'가, 테헤란에는 '서울로'라는 이름의 대로가 있다고 한다. 회사 근처를 걷다 실제로 '테헤란로'라는 도로명이 새겨진 조각상도 보았다.


테헤란1.jpeg 테헤란로 표지 조각상 @ 테헤란로 끄트머리


테헤란2.jpeg 테헤란로 표지 조각상에 나와있는 설명 @ 테헤란로 끄트머리


그날은 겨울의 장막이 서서히 걷혀가는, 2월 말이었다. 아직은 패딩을 입고 다니는 시기였다. 여섯 시 반에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특히나 빨리 회사를 벗어나고 싶은 날엔 회사 건물 출입구를 빠져나오는 내 모습이 회사 건물이 나를 뱉어내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속이 너무 안 좋을 땐 차라리 토를 해서 속을 답답하게 하는 물질을 밖으로 뱉어내야 비로소 속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처럼.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 하는데 노을이 지나가고 어두워지는 밤하늘이 예뻤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는데도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지금 버스를 타기보단 조금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위에 걸을 만한 마땅한 공원이나 산책로가 없었다. 그럼 그냥 눈앞에 보이는 길을 걸어야겠다 결심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테헤란로를 걷기로 했다.


테헤란로걷기.jpg 삼성역 -> 선릉역 -> 역삼역까지 걸었다. 오른쪽 위 빨간 점이 테헤란로 표지 조각상이 있는 곳. (2020.02)


나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도 되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도 된다. 삼성역에서 한 정거장만 걸으면 선릉역이고, 선릉역까지는 1.2km니까 충분히 걸을만하다. 마침 운동화도 신고 있겠다, 걷기 시작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무역센터를 지난다. 양 옆으로는 계속 높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서 그 사이를 걷는 자그마한 미물인 나는 건물의 위세에 눌려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재생해 이 현실을 비현실의 세계로 느끼게 만들어버렸다. 현실이 아니라 마치 꿈속의 길, 게임 속에 들어왔다고 상상하면서.


혼자 걸으니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출 필요 없이 속도를 내도 괜찮다. 시간은 흐르고 점점 더 밤이 되어가지만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오히려 땀도 나는 거 같다. 입고 있던 패딩의 지퍼를 내린다. 바람이 들어오니 가슴의 답답함이 사라졌다. 나는 계속 큰 도로변의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멈췄다가 신호가 바뀌면 건너가기를 반복하며 걷는다.


역 근처를 지나니 확실히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다. 그나마 걸어오는 사람들은 죄다 지하철역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즉 나는 그들 = 다수와 반대로 걷고 있다. 나는 남들이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로 걸어갈 때 항상 이 노래를 떠올린다.



사람들과 반대로 걷고 있네 얼마나 걸었는지 몰라
어느샌가 나만 홀로 남아서 막다른 길을 향해 가
피할 길이 없어 피할 길이 없어

<곳에 따라 비>, 가을방학



하지만 이젠 가을방학의 노래를 제대로 듣지 못하겠다. 가을방학의 노래를 주로 만들었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 작사가인 정바비가 전 여자친구들에 대한 불법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하고 그걸 빌미로 협박을 했다는 혐의로 불구속 송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구속이 아닌 거지?) 그가 한 때 사랑했을 여자친구는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평소 가을방학의 가사를 보면 굉장히 섬세하고 그게 여자들의 감수성을 잘 건드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생각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세심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약간 변태 같달까란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는데 정말로 그렇다는 결과를 직접 들으니 참 씁쓸하고 역겨웠다.


가을방학은 인디씬에선 많이 알려진 편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는 밴드였을 거다. 그런데 정바비가 방탄소년단 앨범에 참여하게 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가을방학에서 주로 노래를 부른 보컬 계피는 노래를 부른 사람의 몫과 노래를 들은 사람의 몫이 있으니 그걸 알아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을 떼어내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개그맨 김생민도 리포터로만 조용히 살았다면 과거의 사건은 드러나지 않고 그냥 묻힌 채로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 유명해지면서 과거의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가 영수증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정말 재미있게 봤지만 방송에서 어떤 뉘앙스의 말을 했을 때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나는 발언들을 했고 나는 들으면서 약간 불편한 지점이 올 때가 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좀 예민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결국 사실로 밝혀졌을 때의 실망감과 내가 틀린 걸 본 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오싹해졌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선릉역이다. 네이버 지도에 나오는 예상 시간보다는 빨리 도착한다. 그런데 뭔가 좀 아쉽다. 좀 더 걷고 싶다. 나의 오늘 걷기 총량이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선릉역 다음 역은 역삼역으로 선릉역에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 1km 정도면 걸을만하다.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선릉역을 지나 다음 목적지인 역삼역(거꾸로 해도 역삼역이다)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확연하게 언덕길이 펼쳐진다. 은근 힘이 든다. 이 쪽도 역시 지하철역을 벗어나니 걷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여기도 역시 걷는 사람들은 다 지하철역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회사에서 나와서 걷기 시작했을 땐 그나마 밝은 푸른빛이 감돌았던 하늘은 이제 완연하게 어두운 색으로 뒤덮여있다. 하지만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는 이 시간, 땀은 좀 나지만 참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고, 찜찜했던 감정들을 그대로 길가에 흘려보냈다.


그렇게 역삼역까지 걸었다. 사실 더 걷고 싶었다. 걷기가 무서운 게, 한번 추진력을 얻으면 멈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내 몸의 연료인 기력을 소진할 때까지, 어느 정도 지칠 때까지 걸어줘야 성이 풀린다. 이 다음 구간인 역삼역에서 강남역은 약 1km가 되지 않으니까 방금 걸어온 선릉역-역삼역 구간보다 짧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 시간이 일곱 시 반을 향해 가고 있었고 저녁을 먹지 않은 상태여서 배가 고파왔다. 이제 집으로 간다고 해도 또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조금 아쉬운 상태에서 멈추기로 했다.


따뜻한 밥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자. 하루 종일 따뜻했지만 답답한 사무실에 갇혀 사람들과 대화와 숫자와 싸움하느라 고생한 머리를 비워냈다. 이상하게도, 걷느라 고생했을 다리마저도 가벼운 느낌이 든다. 만약 집에 가서도 걸은 게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영 성에 차지 않는다면 저녁을 먹고 집 앞의 천변 산책로를 걸어도 된다고, 나를 달래며 지하철역 입구로 걸어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극히 사적인 걷기 (1) : 구반포역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