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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Dec 19. 2020

쓰는 인간에 대한 단상 (상)

영화 '미세즈 노이지'를 보고 쓰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다

     바야흐로 2020년에 도래한 언컨택트 시대. 국내에서 개최된 영화제의 경우도, 행사가 열리긴 했지만 축소 운영하거나 일부 온라인 상영을 운영하기도 했다. 극장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영화제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제에 출품되는 모든 작품이 온라인 상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다. 


     나는 한 때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영화제, 단편영화제 또 국내 3대 영화제라 불리는 전주, 부산, 부천영화제 등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열정이 소진되었는지 지방은 거의 가지 않고 그나마 서울 권역에서 개최되고 가볍게 볼 만한 상영작이 많은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만 가고 있다. 


     나는 원래 영화, 드라마에 관심이 없어 잘 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대학생 때, 단지 재미있어 보여 참여했던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자원봉사 활동으로 인해 영화제라는 행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특히나 부천엔 매년 갔었기 때문에 항상 7월엔 부천에 있는 느낌이었다. 


     흔히 '영화제'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들만 상영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많은데 부산국제영화제나 전주 국제영화제에 비해 부천은 '판타스틱'영화제라는 명목 하에 공포영화도 있지만 그 외 가족, 코미디 등등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은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올해는 영화제 현장에 가지 않았고 온라인 상영만 보기로 했다. 온라인 상영으로 장편 3개와 단편 2개를 봤는데 이 글은 그중 장편인 일본 영화 '미세즈 노이지'와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즘의 나는 '쓰는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이다. 사실 그전에도 무언가를 써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저 비공개 블로그에 혼자 끄적이는 글이었다. 감정이 가는 대로 줄줄이 써재낀 글에 불과했다. 내가 나에 대해 쓰는 글이니까 앞뒤가 좀 안 맞거나 설명이 생략되어도 그 글을 혼자만 읽는 나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 벌어진 사건 아닌 사건들에 대해 쓴 글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요즘은 예전보다는 쓰는 건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것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내가 일을 잘 벌리는 스타일이 아니니 새로운 사건이 없어 소재거리가 줄어드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고 그 결과 브런치 개설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사소통의 영역인 ‘듣기/읽기/말하기/쓰기’가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의 나는 말할 사람과 상대가 없다고 느낀다. 엄마랑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재미있지만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럼 친구는? 나는 원래부터도 친구가 많지 않았고 예상했던 대로 나이가 들며 삶의 경로가 달라지니 연락이 끊기는 친구들이 한두 명 늘어갔다. 


     그나마 남은 소수의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낳으면서 나와 고민하거나 생각하는 지점, 환경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그녀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나의 이야기는 그저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재밌게 사는 듯 보이면서 도대체 뭐가 고민인지 모를, 배부른 이야기라고 생각할 테니까. 혹은 친구들에겐 '그러게, 왜 내가 여태 소개팅 시켜준 사람들하고도 잘 안 되고 계속 애인도 못 사귀고 그래?' 같은 이야기로 귀결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말할 상대가 극히 적어졌으니 그 욕구가 '써야겠다'는 쪽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써보자.



     그런데 어디에? 지금처럼 그냥 비공개 블로그에 혼자 끄적일 거야? 이건 '쓴다'기 보다는 감정의 '배설'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욕을 쓰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마구 써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 거 말고, 좀 더 다듬어진 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읽어도 좋은 글을 쓰는 건 어떨까? 


     좋은 글의 정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읽어서 재미있는 글, 다른 걸 상상하게 하는 글 혹은 내가 겪었던 일과 너무 비슷해서, 세상에 나 말고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줄 수 있는 글 혹은 세상에나 이런 일을 겪은 사람도 있단 말이야? 하며 놀라게 하는 글 또 한편으론 내가 찜찜하게 여겨왔던 어느 한 부분을 누군가가 들춰내 줬을 때의 쾌감을 불러 일으키는 글. 


     내가 원한 건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 글을 통해서 대화하고 싶었다. 그럼 조금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영화 '미세즈 노이지'의 주인공 마키는 소설가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남편과 아이 하나가 있는 소설가로 데뷔작은 상도 받고 참신했던 듯 보이나 그 뒤로 발표하는 작품들은 전부 거절당하고 잘 안 풀린다. 뭘 좀 열심히 해보려고 해도 하나 있는 아이가 유치원 종일반 추첨에 탈락해서 낮에 데려와서 집에서 돌봐야 하는 데다 남편도 그런 그녀를 도와주려고는 하지만 삐그덕거린다. 


     그녀는 그 와중에 '일' 즉 오로지 쓰는 것만 생각한다. 나에겐 이것밖에 없다는 절실함과 시간이 갈수록 옥죄어오는 마감일. 그 모든 것에 쫓기다 보니 오히려 글이 더 잘 안 써진다. 


     그러던 중 이사를 하고, 새 집에서 글쓰기에 몰두해 있다가 딸이 집 밖으로 나간 것을 뒤늦게 알아챈다. 다행히 딸은 옆집 아주머니와 놀았다고 하는데 마키가 보기에는 영 이상한 사람 같다. 딸은 엄마가 놀아주지 않으니 자꾸 집 밖으로 나갔고 어느 날은 저녁이 다 돼서도 돌아오지 않아 경찰에 신고하고 난리가 난다. 


     그런데 딸은 옆집에서 놀다가 잠들었다며 옆집 아주머니와 함께 나타난다. 심지어 나중에 들어보니 옆집 아저씨가 '씻겨'줬단다. 요즘 같은 시대엔 누가 봐도 오해할 소지가 있는 상황이다. 마키는 이성을 잃고 옆집 여자와 적을 지게 된다.


     게다가 이 옆집 아주머니는 아침 6시부터 좀 시끄럽게, 누가 봐도 유난스럽게 베란다에서 이불을 턴다. 그 소음에 마키는 미칠 지경이다. 글에 대한 스트레스가 배가 된다. 그런데 옆집 사람 시점에서 보면 완전 다른 상황이다. 그녀가 보기엔 마키는 애를 방치하는 엄마였고 오히려 혼자 나가 놀던 딸내미를 거둬서 같이 공원에도 데려가 주고, 집에서 나와 혼자 복도에서 노는 아이가 다른 위험에 빠지지 않게 자기 집으로 데려가 닦이고, 먹이고, 씻기고 놀아준 건 그녀였다. 


     그리고 옆집 아저씨가 씻겨줬다는 건 알고 보니 물에 담가서 목욕을 씻겨준 게 아니라 물 묻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마키는 글을 쓸 때 펜네임 즉 본인의 본명이 아닌 필명을 쓰는데 미즈사와 레이란 가명이다. (여기서의 레이도 3월의 라이온에 나오는 레이랑 같은 한자인가? 일본어로 숫자 0을 의미하는 영零 말이다.) 


     딸은 우리 엄마가 작가라며 엄마의 데뷔작을 추천해줘서 옆집 아저씨는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딸내미와 엄마에게 자기네 집에 놀러 오라고 몇 번이나 얘기하지만 이미 옆집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들로 낙인찍은 마키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한다.


     마키는 그녀의 반백수 사촌동생에게 이런 일이 있어 옆집 여자 때문에 미쳐버리겠다고 하자 사촌동생은 오히려 그걸 소재로 살려 소설로 쓰라고 조언해준다. 사촌 동생은 그녀의 집에 왔다가 우연히 옆집 아주머니랑 마키가 베란다에서 싸우는 걸 보고 동영상으로 찍은 후 그걸 인터넷에 올렸는데 조회수가 엄청 잘 나오게 된다. 마키는 사촌동생의 조언을 듣고 옆집 아주머니 와카타씨를 소재로 해서 쓴 소설이 호평을 받고 잡지에 실린다. 


     한편 인터넷에선 동영상이 점점 화제가 되는데 소설과 동영상의 내용이 비슷하니 혹시 실화가 아니냐며 사람들이 동네로 찾아온다. 그 와중에 마키의 딸 나코(낫쨩)와 옆집 아저씨가 베란다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모습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며 오해를 사서 아저씨가 자살시도를 한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아저씨가 원래 약간 정신질환이 있는데 이불에 벌레가 돌아다니는 환각이 보여서 아줌마가 그 새벽에도 남편에게 보란 듯이, 남편을 안심시키려고 벌레가 떨어져 나가라는 듯이 일부러 이불을 열심히 털었던 것이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어느 쪽에서 그걸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작품에 대해 조언해주는 출판사 직원은 마키에게 소설을 쓸 때 캐릭터에 너무 갇히지 말고 사건을 다면적으로, 입체적으로 보라고 충고한다.


     와카타 아주머니는 이웃인 마키와의 갈등에 일하는 곳에서 품질이 조금 떨어진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오이를 보며 보며 오히려 세상이 몰상식한 거 아니냐고 울부짖는다. 마키는 옆집과의 소송을 위해 증거로 동영상을 찍었는데 그걸 또 사촌동생이 인터넷에 올려버렸고 일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게 소설이 아닌 실존 인물을 그대로 갖다 쓴 게 다 들통이 나서 마키는 연재도 잘리고 옆집 아저씨도 자살 시도를 하는 바람에 모든 화살이 마키에게 돌아온다. 사죄하라고 기자들이 집 앞으로 찾아오자 마키는 미칠 것 같다. 그 와중에도 옆집 아주머니는 아이를 구해내 기자들을 벗어난다. 결국 마키 가족은 그 집을 떠나 이사를 한다. 1년 뒤, 마키가 이번엔 필명이 아닌 본명으로 된 책을 내고 그 책을 아주머니에게 보내준다.



'쓰는 인간에 대한 단상 (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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