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에 떠난 내일로 여행기
박새별의 <seasky>.
나에겐 이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풍경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풍경.
2011년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 살(만으로는 스물셋쯤 되었겠지), 나는 첫 번째 내일로 여행을 떠났다. 혼자 당일치기로 여행을 가본 적은 있었지만 이번엔 혼자서 3박 4일이나 여행을 하는 대장정이었다.
첫날 일정이었던 안동은 찜닭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나는 닭을 좋아하기에 처음으로 동행을 구하게 되었다. 동행을 구하는 수많은 글 중에 나와 같은 날 안동으로 출발해 찜닭을 먹을 사람을 구한다는 글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글을 올린 사람은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 있다면서 연락하려면 문자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 끌렸다. 당시엔 나도 스마트폰이 아닌 일반 핸드폰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최자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도 그날 서울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만났다. 지정좌석이 없는 내일로 여행의 특성상 빈자리에 앉아있다가 좌석 주인이 오면 자리를 비켜줘야 했기 때문에 그녀와 계속 같이 앉아서 안동역까지 갈 수 없었다. 적극적이고 밝은 그녀는 옆자리 아주머니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길래 나도 은근슬쩍 옆에 앉으신 아주머니께 말을 걸어보는 경험을 했다.
안동역에 도착해 나 말고도 주최자에게 연락이 온 두 명을 더 만났다. 찜닭 먹기에 딱 좋은 인원인 4명이었다. 남자둘, 여자 둘이었는데 로맨스는 없었다. 내가 거기서 나이가 제일 많았다는 슬픈 사실. 아무튼 넷이서 찜닭을 맛있게 먹고 다음 일정은.... 보통 여행객들이 안동에서 가는 곳은 정해져 있다. 하회마을 또는 도산서원. 다들 하회마을에 간다길래 밥 먹으면서 친해져서 그대로 같이 하회마을을 구경했다. 그러고 나니 하루가 갔다.
어차피 저녁을 먹어야 해서 시내로 나와 또 같이 저녁으로 안동간고등어 정식을 먹고 안동소주도 마셨다. 야경으로 유명한 월영교에도 갔다. 좋았다. 나는 철저하게 3박 4일 동안 혼자서만 여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찜닭 때문에 하루종일 처음 보는 이 친구들과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숙소는 제각각이었기에 다들 역 앞에서 헤어졌다. 당시엔 아마 게스트하우스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모텔에서 묵기로 했다. 전혀 모르는 친구들이었지만 그래도 한나절 같이 여행해서 내 주위가 북적북적했는데 모텔에 혼자 들어가니 정적만이 나를 감쌌다.
다음날부터는 진정으로 혼자 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안동에서 강릉으로 넘어갔다. 나는 뚜벅이 여행자니까 웬만하면 버스를 타고 이동하려고 했다. 그런데 경포대에서 안목해변으로 가는 길은 버스를 탈 수 없어서 무조건 택시를 타야 했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고 경포대 앞이라 택시는 많았다. 택시정류장에 택시가 주욱 늘어서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런 택시정류장에서는 순서대로 앞에 있는 택시부터 타야 한다. 나는 잘 몰라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어떤 예감 때문인지 먼저 세워져 있던 택시가 아닌 두 번째 택시 쪽으로 다가갔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앞에 있는 차를 타라고 손짓해서 하는 수 없이 첫 번째로 세워져 있던 택시를 탔다.
나는 평소에 택시를 잘 타지 않아서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외박하는 여행을 해본 것 또한 처음인지라 순진했다. 기사는 남자분이었다. 나는 누가 봐도 배낭을 멘 여행객 차림이니 여행 왔냐고 물어본다. 나는 순진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대답하고 나니 아차 싶다. 그 뒤로 이어지는 기사의 말투는 혼자 여행 와서 딸내미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나이 든 아저씨가 20대 여자애가 혼자 여행 온 거 같으니 어떻게든 꼬드겨 보려고 하는 그것이었다. 그래서 조금 이따가 친구를 만난다고 둘러댔다. 실제로 어제 여행한 친구들 중 한 명을 내일 만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이따가라는 시간 개념이 내일까지 커버하기엔 좀 넓긴 하지만.
기사아저씨는 운행을 하면서 새벽에 산책하기가 좋다는 둥 혼자 와서 심심할 테니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둥 개 같은 소릴 지껄였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이 쌍놈새끼야!!! 어디다 수작질이야?'라고 소리 지르지 못했다. 그러다 지금 저 아저씨가 쥐고 있는 운전대를 꺾어버린다던지 아예 모르는 곳으로 날 끌고 가면 어떡해? 당장 9시 뉴스감이다. 태연한 척 앉아 있었지만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행히 거리가 멀지는 않았고 택시는 큰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이 아저씨 맞장구를 쳐주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는 방법을 택했다.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요금을 계산하고 내리려니 계산을 마친 아저씨가 명함을 한 장 건네준다. 필요하면 전화하라면서. 일단은 받고 내렸다. 그리고 택시는 떠났다.
택시가 떠나고서야 '저 xxxxx 놈!!!!!!!!' 하며 욕을 했다. 손이 닿은 명함조차도 불쾌했다. 너무 열받아서 발을 광광 구르며 명함을 찢어서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참 얄궂은 게 명함이 잘 찢어지는 종이가 아니라 코팅이 된 소재라 잘 찢어지지도 않는 것이었다. 더 성질이 나서 막 구기다가 내가 왜 여기다 쓸데없이 힘을 쏟고 있나 싶어 그냥 백사장에 던져버렸다. 이 아름다운 바다를 앞에 두고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야 할까.
나중에 생각하니 명함을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다가 강릉시 관광과 같은 공공기관에 신고를 할 걸이란 생각이 미쳤지만 이미 늦었다. 큰 경험 했다 생각하자. 다행히 내가 중간에 그 아저씨의 의도를 눈치챘고 아무 일도 없이 마무리되었으니까. 하지만 다음부턴 절대 택시를 타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다음날은 묵호와 태백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첫날 안동을 같이 여행했던 친구 중 한 명이 자기도 나랑 같은 날에 태백을 갈 수도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혹시나 오면 연락하라고 한 상태였는데 저녁에 연락이 왔다. 자기 내일 태백 갈 거 같은데 같이 구경하자고. 그래서 좋다고 했다.
강릉에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묵호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논골담길이라는 벽화마을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봤다. 아침 9시도 안 된 이른 시각이어서 그런지 동네가 참 조용했다. 그리고 날씨가 참 좋았다. 조용히 벽화를 보며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마을 꼭대기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동행한 친구는 여전히 낯선 이었지만 이틀 전 여행의 첫 출발지인 안동을 함께 여행했기 때문에 완벽하게 낯선 이는 아니었다. 논골담길에서 봤던 아침 8:45분경의 바다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침 9시도 안 된 이른 시각 논골담길의 벽화를 보며 올라갔다. 핵아싸인 나는 안동에서 만난 친구들과 헤어진 뒤로 처음 계획했던 대로 혼자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어제 강릉에서 탄 택시에서 여자 혼자 여행한다는 것을 '티 낸 죄'로 (이걸 죄라고 할 순 없지만 ㅠㅠ) 택시기사한테 휘둘릴 뻔하고 기분이 매우 다운되어 있었는데 그래도 하루 여행했던 사이인 이 친구를 만나게 돼서 더 반가웠다.
논골담길을 쭉 올라가서 봤던 동해바다. 너무 예뻤다. 꼭대기에 올라서 각자 잠깐 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그때 이 노랠 들었었다. 정말 1차원적인 선곡이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광경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설렜다. 바다의 수평선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순간. 아침나절의 빛나는 바다. 내 옆에는 낯선 이지만 그래도 길을 지나가는 아저씨보다 적어도 어제 그 택시 아저씨보다는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저 멀리 나뭇잎 사이로
다정한 햇살이 날 불러
눈부신 이 날에 그대와
함께하는 우리의 노래
나른한 공기 바람결에
따스한 온기 그대손길
풀냄새보다 더 싱그런
그대와 그대 숨결
물빛 하늘 구름 바다
하얀 웃음 그대와 나
푸른 햇살 바람 향기
나의 사랑 나의 그대
<seasky>, 박새별
묵호항 구경을 마치고 태백으로 이동해서 바람의 언덕을 가기로 했는데 중간에 택시를 타야만 하는 구간이 있었다. 어제 택시에서 그런 일을 겪은 직후였기 때문에 혼자라면 절대 가지 못했을 거다. 동행한 친구는 남자애였는데 남자라고 해도 하루이틀 여행을 같이 하며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친구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기에 묵호에 와서 하루 더 동행하자고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 같이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별말 없이 앉아만 있어도 너무 안심되고 고맙기까지 했다. 여자 혼자 택시 타는 일이 이렇게 어렵고 슬플 줄이야.
요즘이야 카카오택시로 편하게 택시를 잡을 수 있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그날은 그 친구와 하루종일 여행을 잘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이로 족했던 것이다.
같은 노래를 들었던 두 번째 풍경은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