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영화 <족구왕>을 보고 양림동 떡볶이를 먹다
2014년 8월의 어느 날 있었던 여행기입니다.
페퍼톤스 5집 앨범이 발매됨과 동시에 전국 클럽투어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서울에서도 하니까 굳이 지방에 갈 필요가 없었지만 문제는 서울 공연날 이미 데이브레이크 공연을 예매했다는 데 있었다. 혼자라면 취소라도 할 텐데 친구랑 가기로 해서 그러지도 못하고. 그럼 남은 도시 중에 어디로 갈 것이냐?를 정해야 했다. 하필 클럽투어가 있는 첫 번째 주에는 제천 영화제를 가는 관계로 남은 선택지인 대전과 광주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서울에서 거리상으로 가까운 대전을 선택해야 맞겠지만 대전공연은 역시나 일요일에 잡혀있다. 아무리 대전이 서울에서 가까워도 월요일 아침 주간 회의를 앞두고서 일요일에 서울도 아니고 지방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가자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좀 멀어도 토요일에 공연이 있는 광주에 가기로 했다.
광주로 가기로 정해놓고 보니 올해 초에 광주에 가서 광주극장도 가보고 양림동 떡볶이도 먹어야지라고 스스로 생각해 둔 계획이 있었다. 그럼 광주로 가야 하는 이유는 충분해졌다. 계획을 짜야겠어.
영화관 시간표를 다 둘러보고 다닌 끝에 광주극장 대신 CGV에 가기로 하고 야간도 아닌 심야버스를(!) 타고 밤새 내내 오면서 자기로 계획을 만들었다. 나는 혼자 심야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꼭 한 번쯤 심야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광주터미널에 있는 CGV는 무비꼴라쥬관이 있어서 독립영화들을 상영해 주기 하기 때문에 심야버스를 기다리면서 심야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주 수요일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급히 고향인 군산으로 내려가셨다. 광주하고 군산은 그리 멀지 않다. 그래도 광주까지 갔는데 군산에 들러서 할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해 여행일을 앞두고 계획을 수정했다. 그래서 수정된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2014년 8월 모일 토요일 <페퍼토닉 여행기>
7:50 무궁화호 광주행 기차 탑승
12:20 광주역 도착(광주송정역 아님 주의)
13:50 영화 '족구왕' @ 광주터미널 CGV
15:45 영화 종료 후 양림동 떡볶이로 이동
16:30 양림동 떡볶이 먹기
18:00 페퍼톤스 5집 발매기념 클럽투어 광주 편 @ 네버마인드
19:40 공연종료
21:00 광주-군산 간 시외버스 탑승
23:00 군산시외버스터미널 도착
광주에 가는 건 아마도 이번이 세 번째인데 이상하게도 항상 여름에만 갔었다. 광주행 기차에서 자리를 잘못 잡아 단체 관광객 사이에 끼어서 갔는데 센스 있는 여행 담당자가 좌석을 앞뒤로 배치하지 않고 일렬로 길게 늘어 트려 줘서 덕분에 4인 좌석에 끼지 않고 왔다. 일행인 아줌마들은 자기들끼리 앉지 못해서 불만을 터뜨리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다. 전날도 늦게 잠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다 보니 광주까지 가는 내내 거의 잠만 잤다. 막판에 일어나 잠깐 페퍼톤스 음악을 들었는데 설렜다.
광주역에 내려 스탬프를 찍으니 처음 보는 모양이다. 그동안은 광주에 올 때 광주송정역으로 왔었기 때문에 광주역으로 오긴 처음이었다.
오늘 볼 영화는 <족구왕>이다. 페퍼톤스의 3집 수록곡 '핑퐁'의 뮤비를 찍기도 한 우문기 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에는 페퍼톤스의 신곡 <청춘>이 삽입되었고 영화평도 좋은 편이었다. 영화 <족구왕>을 선택해놓고 보니 이번 여행은 페퍼톤스 노래가 삽입된 영화에 저녁엔 페퍼톤스 공연까지 그들을 직접 만난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페퍼토닉 여행이 된 것이다.
<족구왕>은 웃픈 영화였다. 지금 대학생들이 보면 더더욱 좋을 영화였다. 영화는 굉장히 현실적인데 한 명쯤은 있을법한 찌질한 복학생과 친구와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그려진다. 사실 '청춘'을 그냥 들을 땐 특별한 감흥이 없었는데 영화가 끝나면서 나오니까 매우 좋았다. 게다가 깨알같이 특별출연한 교내방송 아나운서 장원리의 목소리도 좋았다.
예상했던 대로 영화가 끝나고 나니 마음이 급해졌다. 입장시간에 맞춰서 들어가는 건 포기했지만 공연 시작인 여섯 시 전에는 꼭 공연장에 도착해야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양림동 가는 버스를 한참 기다려서 탔다. 더위를 헤치고 2년 전 걷던 그 길을 걸어 떡볶이집에 도착했다.
역시 낮 시간이라 그런가 손님이 한 명도 없다. 들어가면서 바로 1인분을 주문하고 내가 올 때마다 앉던 자리에 앉는다. 서가를 살펴보니 2년 전에 보던 그 책, <나의 가장 아름다운 적>이 아직도 있다. 다만 누군가가 뒤적였는지 내가 읽은 표시를 해놓은 부분이 없어졌다. 대충 펼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부분부터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바로 떡볶이가 나왔다. 그런데 뭔가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듯한 이 맛은 뭘까. 그래, 주인장 할머니도 두 살을 더 드셨으니 맛이 좀 변했나 보다. 배가 고파서 우걱우걱 먹긴 했지만 만약 다음번에 또 광주에 온다면 굳이 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이 식당에만 있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해서 다음에 또 와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한담. 아무튼 떡볶이 맛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약간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뒤 계산하고 나왔다.
<2014년 8월, 광주 페퍼토닉 여행기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