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여행 마무리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데...
2021 여름휴가 북캉스 : 파주 여행기 (상) (링크 : https://brunch.co.kr/@lifewanderer/226)에서 이어집니다.
이번 편은 휴가 3일 차 ~ 6일 차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2021 여름휴가 일정 : 북캉스, 책과 함께
일 : 휴가 1일 차 - 파주 여행
월 : 휴가 2일 차 - 파주 여행
화 : 휴가 3일 차 - 파주 여행
수 : 휴가 4일 차 - 파주 여행
목 : 휴가 5일 차 - 국립중앙도서관 방문
금 : 휴가 6일 차 - 강남 교보문고 방문
여행 셋째 날이 밝았다. 전날 밤에 넷플릭스였나 웨이브에서 유치한 중드 하나를 보기 시작했는데 다 뻔히 아는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그래도 궁금해져서 계속 다음 편, 다음 편을 보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날을 꼬박 새웠다. 그래도 잠을 아예 안 잘 순 없어서 3시간 정도 쪽잠을 잤다. 이건 내가 집이 아닌 여행지에 있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평소라면 절대로 보지 않을 유치한 드라마 하나에 매달려 날밤을 꼬박 새우는 일.
일어나서 식사도 하고 글을 쓰기 위해 숙소 근처에 있는 북카페 ‘파랑’에 갔다. 이 동네엔 본격적인 식당 같은 밥집은 없어서 그런지 카페에서 대부분 브런치 메뉴를 팔고 있었다. 아점으로 명란 아보카도 덮밥을 배불리 먹고 글쓰기를 시작한다. 오전이라 손님도 거의 없고 조용해서 좋다. 여기도 건물 2층부터는 출판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맨날 보는 곳이고 역시나 일터니까 별로 신기하진 않겠지?
점심 시간대가 지나서까지 카페에 머물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숙소에 들러 짐을 풀고 최소한의 짐만 챙겨 어제 갔던 카페 '지혜의 숲'으로 다시 향했다. 한 번 갔던 길이라 그런지 익숙하고 훨씬 더 빨리 도착한 느낌이 든다. 서가를 돌며 어제 찜해뒀던 책을 두 권 골라왔는데, 각각 번역가와 통역가가 쓴 책이다. 책, 글쓰기, 독서, 언어 공부에 관심이 많은 내가 무의식 중에 그런 걸 염두하고 고른 걸 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책을 잘 읽고,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다. 3박 4일이라고 해도, 시간이 훌쩍 간다.
여행 넷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 되었다. 파주 근처의 연천에 호로고루라고 하는, 해바라기가 멋지게 핀 작은 동산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들렀다 집으로 가기로 한다. 큰 도로를 달리다 작은 길로 접어들었고 정말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돌고 돌아 행사장에 도착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해바라기들이 싱싱하지 않다. 이미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지난 모양이다. 그래도 한 바퀴 둘러보고 위쪽으로 올라간다. 호로고루는 고구려 때 쌓은 성벽이 남아있는 곳으로 해바라기 밭 뒤쪽으로 오래된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었다.
가을이다. 잔디밭은 온통 초록빛이고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으니 조금만 높은 언덕인데도 그곳에 서있자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서 음악을 들으며 동산을 걸었다. 혼자 여행 오면 이런 점이 좋다. 이제 구경 끝났으니 갈까?라는 상대방의 말과 상관없이 내가 있고 싶은 만큼,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다는 점이. 연천부터 집까지 무사히 차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휴가 5일째, 오늘은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는 날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중간에 버스도 한 번 갈아타고 한강도 건넜다. 곧 내릴 때가 되어 준비를 하고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보무도 당당하게 도서관 앞으로 걸어가는데 도서관 입구 문 앞에 커다란 대자보 같은 것이 붙어있다. 그때 머리를 스치는 한줄기 생각.
무의식 중에 잠깐 떠올랐던 그것. 코로나 때문에 건물 입장을 통제하거나 입장 시 예약을 받는 곳도 있던데 설마 여기도? 하지만 나는 이 생각만 하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해보지 않았다. 슬픈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문 앞에 붙어있던 안내문에는 지금 이 문은 개방을 중지하니 다른 문으로 들어오라고 알려주면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은 예약제로 입장이 제한되고 있고 예약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망했다. 그래서 나는 휴가 6일 차인 다음 날 스케줄이었던 강남 교보문고 방문을 오늘로 당기기로 했다.
조금 허무한 마음으로 교보문고에 도착했다. 교보문고에 온 건 9월 김영하북클럽 책으로 선정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기 위해서이다. 이상하게도 북클럽에 선정되는 도서는 당장 나의 고민이거나 혹은 내가 최근에 고민했던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던 것들을 주제로 한 것들을 다루고 있어서 기쁘다. 왜냐하면, 나만 고민하는 줄 알고 나만 외로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지금까지 적자생존이라는 단어를 믿어왔고 그렇기에 앞으로 어딘가에 나의 유전자를 남길 일은 없지 않을까 혹은 그 확률이 매우 낮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저자의 말에 위안을 얻었다. 과학서이다 보니 실험에 기반한 내용을 바탕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형식인지라 실험 관련된 부분이 나올 때는 문과생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거나 시간이 걸리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다정함과 협력적 의사소통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에 아무리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도 엄마가 되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금방 친밀하게 대하는 게 그런 연유인가 싶었다.
서점에서 나와 점심으로 근처에 있는 유명한 떡볶이집에 들러 떡볶이를 먹었다. 그리고 오후 4시경 미용실을 예약해두었는데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그래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읽으려고 가져왔던, 오늘 반납하려고 가지고 나온 책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강남대로 대로변의 의자에 앉아, 후다닥 읽었다.
한동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 꽂혀서 그녀가 쓴 책들을 죄다 대출해서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 책은 단편 모음집이라 이야기를 자체를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순서 상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읽고 오면 더 잘 이해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중학생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학교 도서관에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빌리러 갔다가 제목에 <빙점>이라고 쓰여있길래 빌려온 책 제목 뒤에는 사실 한자로 한 글자가 더 덧붙여 있었다. 그런데 그게 속편을 의미하는 '속(續)'이라는 한자 인지도 모르고 책을 한참 읽다가(다 읽고 나서였나?) 속편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본편 대신 속편부터 읽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낮 2시가 이제 막 지난 시각, 강남역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과 신논현역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은 참 많다. 하지만 인도에 노점상이 들어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직사각형 형태의 벤치가 아닌 테이블처럼 둥그런 의자를 놓은, 바로 옆으로는 차와 버스들이 빵빵거리며 지나다니고 있는 강남대로변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은 없다. 그런 곳에서 벤치에 앉아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모습은 참 이질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강남대로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북캉스를 수행 중이었다.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미용실에 예약한 시간에 가려면 이제 일어나야 해서 일어났다.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조금 잘랐다. 헤어 커트를 마치고 이번엔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도착해 아까 강남대로변에서 읽다 말던 책이 한 챕터 가량 남아서 후다닥 읽고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그리고 버스 타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날도 너무 좋고 양재천도 좀 걷고 싶어서 그대로 집까지 걸었다.
하늘도 너무 예쁘고
이제 한여름의 더위도 가셔서 선선해졌고
해도 조금씩 짧아지는 이 기분.
곧 겨울을 싣고 올 것만 같은 공기.
내가 좋아하는 게 이런 거구나.
며칠간 오프(off)하면서 일에 대한 생각은 싹 잊고 오로지 책으로 가득 찬 삶.
10살 때부터 집 근처에 천변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번에 이사 온 동네도 집 바로 근처에 한강의 지류인 양재천이 흘러서 좋았다.
서울 시내에 살면서도 자연과 호흡하면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랄까.
발타인잠카이트(Waldeinsamkeit)
독일어 단어인데, 숲(wald)과 고독(einsamkeit)를 합친 단어로, 울창한 숲의 고요한 그늘에 홀로 있다는 뜻으로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하고 정갈한 마음이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이런 시간이 꼭 필요한데, 그러려면 근처에 반드시 공원이나 강과 같은 자연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집 근처 천변에 나가서 걷거나 자전거를 탔다. 그러면 기분이 나아졌고 다시 기운을 얻어서 생활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회사 앞의 테헤란로도 걸을 수 있고, 아까 책을 읽었던 강남대로도 당연히 걸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예전에 살았던 안양천과 지금 살고 있는 양재천을 걷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테헤란로와 강남대로를 걷는다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힐링이 되지는 않으니까.
비록 국립중앙도서관을 가보진 못했지만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낯선 동네를 걷고,
서점엘 가고,
아무도 절대 소설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 강남대로변에 홀로 앉아서 책을 읽은,
며칠 내내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낸 2021년의 휴가를 잘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