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둘러 쌓여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
'북캉스를 기획하다'(https://brunch.co.kr/@lifewanderer/169)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번 편은 휴가 1일 차 ~ 2일 차까지의 이야기입니다.
2021 여름휴가 일정 : 북캉스, 책과 함께
일 : 휴가 1일 차 - 파주 여행
월 : 휴가 2일 차 - 파주 여행
화 : 휴가 3일 차 - 파주 여행
수 : 휴가 4일 차 - 파주 여행
목 : 휴가 5일 차 - 국립중앙도서관 방문
금 : 휴가 6일 차 - 강남 교보문고 방문
파주 여행은 3박 4일 일정이었다. 파주에 가는 날과 서울로 돌아오는 날을 제외하면 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날은 둘째 날과 셋째 날이기 때문에 그날은 가능하면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글 쓰는 데에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여행 첫날. 집에서 차를 끌고 강변북로를 따라 달렸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자유로 맨 끝에 있는 통일동산에 가보기로 했다. 그곳엔 여태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바람개비 동산이 있었다. 이곳 또한 언젠가는 가봐야지라고 마음만 먹었던 장소였다. 경의선 전철을 타고 가야지 생각했는데 이제는 운전이 익숙해져서 드디어 차를 끌고 갈 수 있게 되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통일동산엔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다. 그동안은 이런 거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나만 혼자라서 조금 이상해 보이는 느낌.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 날씨는 조금 덥지만 좋았고 바람개비는 바람에 어여쁘게 빙빙 돌았다. 구경을 마치고 숙소 근처 아웃렛으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다행히 내가 들어오고 나니 그 뒤로 줄을 서기 시작한다.
밥을 먹고 체크인 시간까지 1시간가량 남았다. 뭘 할까, 하다 핸드폰을 꺼내 밀리의 서재 앱을 켰다. 이것은 종이책을 꺼내 드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하지만 몇 달간 연장해가며 써왔던 밀리의 서재 무제한 이용권을 이번 달까지만 쓰고 해지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 책이 밀리의 서재를 이용해 읽는 마지막 책이 될 듯했다. 마지막으로 읽을 책은 작가이자 평론가인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앞에 놀이터가 있어서 아이들이 떠들고 시끄러웠지만 그 소리들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고, 카페에서 울려 퍼지는 배경음악처럼 아이들이 노는 소리를 들으며 집중해서 책을 읽었다.
시간이 되어 아웃렛 근처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숙소에 체크인했다. 사진으로 봤던 것처럼 힙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짐 정리를 하고 저녁거리를 사러 다시 아웃렛으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들고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웃렛엔 사람이 북적북적했는데 숙소가 있는 출판사들이 있는 거리로 들어오자 주말이라 그런지 한적하고 조용했다.
저녁엔 숙소에 있는 넷플릭스를 이용해 영화 <줄리&줄리아>를 봤다. 이미 책으로는 읽어봤던지라 줄거리는 대강 알고 있었지만 영화로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했다. 아, 휴가 와서 보기 딱 좋은 영화구나. 이건 마치 작년 부산여행에서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 도착해 호프 자런의 <랩 걸>을 펼쳤을 때와 맞먹는 만족감과 같았다. (부산여행 글 링크 : https://brunch.co.kr/@lifewanderer/29)
영화 <줄리&줄리아>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주인공인 줄리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민원인들을 상대하고 반복적이고 지루한 업무를 한다는 인상을 주는 공무원은 평범한 화이트칼라 직장인의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장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무실의 좁은 큐비클 안에 갇혀 하루 종일 민원인들을 상대하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하루 중 유일하게 기운이 나는 시간은 바로 요리를 만드는 시간이다. 어떤 요리를 어떻게 만들지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그대로 실행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셰프인 '줄리아 차일드'가 쓴 프랑스 요리책을 보고 365일 동안 매일매일 새로운 레시피에 도전해 그 도전기를 블로그에 남기기로 한다. 당시엔 블로그라는 매체 자체가 신선했지만 요즘은 블로그가 보편화되다 못해 광고매체로 쓰이고 있는 지경이라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순수한 맛은 없어진 지 오래인 것 같다. 그런 시절도 있었더랬다.
처음엔 요리가 좋아서 야심하게 시작했지만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와서 그것도 매일 다른 요리를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데다가 이 도전을 한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요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또 재료를 미리 사다 준비해놔야 할 수 있는 요리도 있는데 손질을 잘못해놓은 바람에 요리를 못하게 되기도 하는 등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날도 수두룩하다. 어느 날은 중요한 손님이 오기로 해서 힘겹게 요리를 해놨는데 그 손님이 못 오는 일도 생기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요리를 하는 건데 그것 때문에 남편과 싸우기도 한다.
각자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또 요리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는 줄리아와 줄리의 이야기가 시대를 뛰어넘어 교차로 진행되는 형식과 한 개인으로서 인생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 줄리아와 줄리가 좌절하면서도 씩씩하게 그것에 대처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사랑의 속성 중 '영원하지 않음'이 있고 극에는 갈등이 필요하니까 바람과 불륜 이야기들이 소재로 많이 쓰이고 있지만 줄리아와 줄리가 각자의 남편과 애정이 있으면서도 건설적인 관계로 지내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보기 좋았다.
나도 몇 년 전에 365일 동안 짧은 글 한 줄 쓰기를 해봐야지,라고 마음먹었던 해가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해내지 못한 적이 있기 때문에 줄리가 이 도전을 마친 것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였다. 나도 무언가에 도전해보고, 거기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을까?
둘째 날 아침. 카페 '지혜의 숲'은 차를 타고 가도 되지만 숙소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오히려 걸어가서 좋았다. 걸어가면서 천천히, 주위의 풍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건물이 없어 건물들이 전부 낮은 데다 오늘이 월요일이라 조용한 건지 아니면 내가 출퇴근 시간대를 벗어난 시간에 걸어서 그런지 길거리에 사람도 없고 차들도 많지 않았다.
북카페까지 걸어가는 도중 영업을 하지 않는 듯한 쇼핑몰도 보였고 나무들도 지저분하게 무성히 자라 있는 길거리를 보면서 과거에 비해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책, 독서, 출판업이 이 풍경에 겹쳐 보여서 좀 안쓰럽게 느껴졌다. 길이 좀 더 깨끗하게 정돈되면 좋겠다.
숙소에서 20여분 걸어 도착한 카페 ‘지혜의 숲’에 도착했다. 일반 카페라면 이 넓은 공간에 테이블을 욱여넣어서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했을 텐데 이곳은 테이블 간의 간격도 널찍널찍했다. 게다가 층고가 높고 전체적으로 조용해서 마음이 편안했다.
일단 밥부터 먹고 본격적으로 카페를 즐기기로 했다. 북카페 옆에 바로 붙어있는, 식사가 가능한 브런치 메뉴와 커피를 파는 카페 나인 블록으로 이동했다. 들어가서 메뉴를 보고 있는데 귀에 들려오는 음악이 익숙하다. 쳇 베이커Chat Baker의 'I fall in love too easily'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노래다. 노래부터 합격이다.
주문을 하고 자리를 고른다. 월요일 오전이었는데도 부지런하게 벌써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손님들이 눈에 띈다. 그분들에게 여긴 그냥 이야기 나누는 카페지 뭐. 생각보다 대화 소리가 시끄러웠는데 나는 좀 조용한 곳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홀 중앙이 아니라 구석 쪽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교적 조용하게 대화하는 한 팀과 나처럼 혼자 왔는데 노트북 타자 소리만 내는 분이 한 명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여기도 테이블 간격이 넓고 매장에 계속 재즈음악이 흘러서 좋았다. 시킨 음식을 배불리 먹고 전자책을 조금 읽다가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야 지혜의 숲 본관으로 이동했다.
자리를 잡고 아이패드를 꺼내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여기 도착해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여긴 책 읽는 공간이 주목적이어서 와이파이를 아예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와이파이 없는 북카페는 처음 봐서 조금 당황했다. 핸드폰으로 테더링을 했지만 아무래도 좀 느리고 불안정했다. 그 점은 좀 아쉬웠다.
그리고 에어컨을 아예 안 틀은 건지 아님 설정온도가 높은 건지 더웠다. 보통은 이런 카페엔 한두 시간만 앉아 있으면 추워서 가디건이 꼭 필요한데 여긴 실내인데도 후끈했다. 햇살이 비추면서 더 더워지자 창가 자리에서 해가 들지 않는 안쪽으로 옮겨 앉았다.
요즘 통 이런 시간이 없었다. 집중해서 글만 쓰는 시간. 집에서도 이런 시간을 갖고 싶지만 집에서의 나는 할 일이 너무 많다. 독립했기에 집안일은 기본으로 해야 하고 취미로 하는 외국어 공부에 이제 공기업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NCS 공부와 경영학원론 공부까지. 정말이지 시간이 너무나 모자라다. 나는 도대체 언제쯤,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치우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잡문이지만 한참 동안 이런저런 글을 쓰고 다듬고, 가져온 책을 읽는다. 카페가 6시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5시 좀 넘어서 정리하고 일어났다. 아쉬운 마음에 바로 나가지 않고 미적거리며 아까 제대로 구경 못한 서가를 좀 더 둘러봤다. 그런데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았다. 서서 읽다 보니 심지어 내가 가져온 책 보다 더 재밌었다! 그렇게 서서 책을 읽다가 내일 또 오기로 한다.
오늘은 카페에서 글을 쓰려다 보니 짐이 많아 가방이 무거웠고 와이파이가 안 돼서 불편했다. 내일은 숙소 바로 앞에 있는 북카페 ‘파랑’에서 브런치를 먹고 거기서 글을 바짝 쓰자. 그리고 숙소에 짐을 갖다 놓고 최소한의 짐만 들고 다시 지혜의 숲으로 와서 카페 내에 있는 책을 읽자.
카페 밖으로 나온다. 3박 4일 동안은 나의 집인 숙소로 돌아오는 길. 기분이 좋다. 오전에 카페에 올 때는 차도가 있는 큰길로 왔는데 이번엔 큰길 안 쪽에 있는 길을 선택해서 걸어본다. 건물들이 낮아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고 풀숲이 무성한 것이 꼭 정돈되지 않은 유럽의 어느 작은 마을길 같다.
여행에 가면 많이 걷게 된다. 유럽 같은 경우, 비싼 교통비 때문이기도 하고 그 거리의 공기를 느끼고 싶기도 해서 그렇다. 걸으면 버스나 차를 타고 갈 때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보인다.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이런 점에서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온몸이 충만한 기분이 든다.
2021 여름휴가 북캉스 : 파주 여행기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