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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Feb 16. 2024

보라색 안개꽃과 함께한 어느 화이트데이

세간의 기념일을 보내는 방법

(2016년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퇴근길에 환승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버스정류장에는 꽤 오래전부터 있었던 작은 꽃집이 있다. 매년은 아니지만 봄이 올 때면 그 집에서 프리지아를 몇 번 샀던 기억이 있다.


     지난주 퇴근길이었나, 버스정류장에서 한참 동안 버스를 기다리면서 꽃집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거의 버스가 올 때쯤에서야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회사 사장님이 열심히 설명해 주셨던 히아신스 구근이 보였고 노오란색 프리지아도 보였다. 나에게 ‘프리지아 = 봄’이다.


 봄이구나.
봄이 왔구나.


     프리지아를 살까,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스키장에 갔던 엄마가 내 퇴근시간과 비슷해서 지금 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엄마가 방금 버스에러 내린 것이다. 그런데다 집까지 가는 버스가 곧바로 왔기에 바로 버스에 올라타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버스에 오르며 생각했다. 다음 주 월요일 그러니까 3월 14일의 퇴근길에는 나에게 주는 선물로 히아신스를 사야겠어.


      그리고 다가온 3월 14일.


     아침 출근길, 히아신스에 대해 검색해 보니 햇빛이 잘 안 드는 내 방에서 키울 식물은 아닌 거 같았다. 그래서 히아신스 대신 역시 봄맞이용으로 프리지아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날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늦은 오후. 엄마가 당신의 퇴근길에 '후리지아 한 단을 샀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생각지도 못하게 엄마가 선수를 쳐버렸다. 하는 수 없지. 그러면서 엄마는 원래 안개꽃이 사고 싶었는데 한 단에 만 원이나 한다고 하면서 프리지아만 샀다고 했다.


     퇴근을 했다. 환승하는 버스정류장에 있는, 원래 가려고 했던 작은 꽃집은 카드결제가 안 될 거 같아 현금을 찾으러 ATM에 들렀는데 굳이 꼭 거기를 가야 되나 싶었다.


      퇴근길 회사 근처에도 꽃집은 있었다. 첫 번째 회사를 다닐 때 행사가 있을 적마다 꽃을 사던 곳이었다. 그때는 그냥 꽃집이었는데 강남에 있는 곳으로 이직했다가 세 번째 회사가 여의도에 있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니 이제는 꽃집과 카페를 겸하는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은 3월 14일, 화이트데이다. 꽃집 대목이라 그런지 손님이 서너 명 있었고 한참 기다려서야 내 순서가 왔다.



나 : "안개꽃을 좀 사고 싶은데요."

직원 : "여기 디피 된 게 3만 원이에요."


    아까 기다리면서부터 디피되어있는 안개꽃을 보긴 했지만 그리 많은 양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좀 더 적은 양을 구매할 수 없냐고 물어봤지만 직원은 일 년에 몇 번 없는 대목을 맞이해 고가의 다른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날 안개꽃 그것도 '조금'을 사러 온 여자는 100%의 정성이 담긴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그래, 뭐, 이미 예쁘게 포장되어 있으니 그래도 사자 싶어 계산했다. 그리고 이미 포장되어 있는 보랏빛 안개꽃다발을 들고 나왔다. 프리지아같은 향은 없지만 보랏빛이 이쁘다. 바깥은 곧 해가 지려는지 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도 예뻤다.


    주말에 또띠아피자를 해 먹으려고 엄마가 올리브를 사 왔길래 얼마 전에 올리브 얘길 했던 절친 JS가 떠올랐지만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걔가 결혼한 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요즘의 나는 그렇다. 결혼한 친구들한테는 연락하기 싫고 그렇다고 결혼 안 한 친구들하고 놀자니 선택의 폭이 좁다. 그런 와중에 JS가 내 맘을 읽은 듯 연락이 왔다.


     남편이 예비군 훈련을 가서 요 며칠 집에 없으니 퇴근하고 한 번 보자는 거였다. 오늘도 특별한 약속은 없으니 오늘 볼 수도 있었지만 그냥 그러기 싫었다. 흔히들 기념일이라고 부르는 날에는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랑 돌아다닌다 해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남편과 같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화 한 통이라도 오지 않겠어? 아무것도 아닌, 별 거 아닌 일인데도 그럴 때 나의 외로움은 증폭된다. 20대 초반엔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꼭 친구들을 만나고 없는 약속도 만들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그게 아니다 싶어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내가 세간의 기념일을 보내는 방법이다.


     하지만 나도 연애를 한다거나 결혼을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기념일을 보내겠지. 그때는 붐비는 길거리를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다 결국 툴툴거리며 '이런 날은 집에서 보내는 게 제일이라니까'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기분을 내고 싶어 질 거다, 분명.


3만원짜리 보라빛 안개꽃. 나에게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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