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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Mar 01. 2024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찼던 어느 토요일 하루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그날 하루의 끝엔 무슨 일이...

     다음 달에 출산을 앞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원래는 아기 낳고 만날까 했는데 아기 낳으면 더 보기 어려울 거 같다고 해서 급하게 날짜를 잡다 보니 당장 이번주 토요일 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바로...



2022년 10월 29일.



     1,2주라도 시간을 여유 있게 잡았더라면 선물로 뭘 줄지 고민도 해보고 인터넷으로 주문도 하고 그럴 시간이 있었을 텐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거의 임신 말기이고 아기 용품도 웬만한 건 다 준비를 했을 텐데. 그래서 고민고민하다 무난하게 쓸 수 있는 핸드크림과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스타벅스 기프트카드를 준비했다. (출산 직후엔 못 가더라도 언젠가는 갈 테니까...ㅎ)






     친구네 집에 가게 되면서 원래 매주 토요일 12시에 하던 바이올린 레슨을 아침 10시로 바꿔야 해서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일어나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며칠 전부터 목뒤 어깨가 엄청 뻐근했는데 오늘도 역시나 뻐근하고 막 고개가 안 돌아갈 거 같다. 그래서 급하게 침대 위에서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고 스트레칭을 했다.



유난히 예뻐서 찍어두었던 그날 아침 풍경. (@우리 집, 2022.10)



     시월의 주말, 아침 햇살이 비추는 침실. 날이 좋았다. 평소에는 커튼이 거의 다 쳐져 있는데 조금 걷어 보았다. 햇살이 기분 좋게 들어온다.


    동작을 할 때마다 어깨가 아팠고 표정이 징그러워졌지만 뭔가 아침부터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을 하는 내 모습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까지 아파야만 겨우겨우 하는 나란 인간. 그래도 왠지 모르게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랄까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앞으로 자주 이런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생각했다.


     바이올린 레슨 마치고 근처 스타벅스에 들러 기프트카드를 구입하고 지하철을 타고 친구네 집으로 출발했다. 친구가 지하철역 앞까지 픽업을 나와줘서 근처 피자가게에서 피자를 포장주문해서 들고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전에도 친구네 집에 몇 번 놀러 온 적 있었지만 이제는 아기 물품과 임산부 관련 물품들이 눈에 부쩍 띄었다. 피자 먹으면서 수다수다... 과일 먹으면서 수다수다...


     친구는 이제 거의 막달이라 의사 선생님이 많이 걸으라고 했다면서 겸사겸사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집 앞에 천이 있어서 거길 따라 걸었다. 날이 좋았다. 크게 한 바퀴를 돌고 집 근처 근린공원 같은 곳에 잔디밭도 넓게 펼쳐져 있고 그네모양으로 된 의자가 곳곳에 있었다. 그곳에 잠시 앉아 쉬었다.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바뀐 나의 심경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친구한테 그나마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은 나를 타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자기가 결혼을 해보니 이러이러하더라 하는 것들을 말해준다. 물론 내가 진짜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아니 노력하고 있는 거 맞냐고 날카롭게 물어오긴 했다. 그래도 그게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할 말을 다 정리하고 간 게 아니라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한 거 같진 않지만 이런 주제로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라서 좋았다. 만약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했다면 전혀 다른 반응일 테니까. 걔가 어떤 반응을 할지 아니까 걔한테는 이런 이야긴 하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친구는 차를 마시고 나는 논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또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고 나니 해가 서서히 저물어간다. 마시던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나기로 했다.


     친구가 다시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해가 좀 남아 있었는데 한참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완전히 어둑어둑해졌다. 남산타워와 그 바로 옆에 초승달에선 벗어났지만 상현달에는 이르지 못한 달이 도심의 한가운데에 밝게 떠있었다. 아침부터 돌아다녀서 조금 피곤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저어기 남산타워 오른쪽으로 보이는 달. (@충무로역, 2022.10)


     배가 고프지 않아서 저녁은 조금 이따 먹기로 하고 오자마자 기세를 몰아 화장실 청소와 방 청소를 후딱 끝낸다. 그리고 냉파(일명 냉장고 파먹기)를 위해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파악해 다음 주 도시락으로 뭘 싸갈까 검색해 보고 결정한다. 그리고 요리 시작. 만족스럽게 요리를 마치고 저녁도 먹고 치우고 이것저것 할 일을 하고... 그러고 나서 침대에 오르니 어느새 새벽 1시. 블로그에 오늘의 감상을 짧게 남기고 자기 전에 유튜브나 좀 봐볼까? 하면서 유튜브를 켰다.


     어라? 이게 무슨 뉴스지? 이번주가 10월 마지막주 주말이라 핼러윈 관련 행사가 있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즐길 나이는 지나서 크게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집 근처 이태원에서 핼러윈 파티 때문에 모인 인파로 압사사고가 났다는 영상이 마구 뜨기 시작했다. 


     압사사고? 장난 같았다. 그런데 영상을 보니 길에 사람들이 꽉 막혀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서 움직이고 길거리와 차도에 사람들이 누워있고, 누워있는 사람 한 명에 두세 명이 달라붙어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재난영화에서 보던 장면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태원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른 채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중국어 방송을 듣고 브런치에 발행할 글을 다듬고 있던 그 시간. 아, 피곤해, 하면서도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시간 참 알차게 보내서 참 뿌듯하다고 생각했다. 피곤하지만 기분 좋은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잠자리에 누운 건데... 내가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는 놀러 나온 친구와 헤어지고 연인의 죽음을 목도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전혀 모르는 사람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CPR을 하고 있었던 거다.


     사상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 이미 수십 명이라고 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처음에 세월호 관련 뉴스를 들었을 때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그때는 초반 보도에선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몰려야 압사당할 수준이 될까? 그곳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단순하게는 지하철이나 버스, 공연장 등 사람이 막 몰리는 곳에 가기 힘들겠지. 그리고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일부-가족, 친구, 친지 등-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겠지. 내가 뭐라고, 이렇게 단 몇 개의 단어와 문장으로 그들의 심정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무례한 게 아닐까 싶어 글을 쓰기가 망설여졌다.






     길고도 길었던 하루. 아침 8시부터 일어나 24시를 지나 다음날 25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된 나의 하루. 유튜브를 끄고 잠자리에 들면서 무사한 나의 하루에 안녕을 고하며 또 세상에 안녕을 고하게 돼버린 사람들의 명복을 조심스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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