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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Apr 26. 2024

가을밤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

오늘 하루 되돌아보기 : 지금 이 현재는 미래에 어떤 과거로 기억될까

(2015년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45일 동안 짝을 이루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버린다는 다소 충격적인 줄거리의 <더 랍스터>라는 영화를 발견했다. 오늘은 이걸 봐야겠다! 싶었지만 비주류영화인지라 상영시간대가 좋지 않고 그나마 상영하는 곳은 신촌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여의도에 입성했는데 다시 신촌으로 이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주에 꼭 보기로 마음먹고 예정대로 나의 아지트인 IFC몰 뒤편에 있는 커피빈에 갔다. 여긴 사람이 대체적으로 없는 편이라 좋아하는 곳인데 오늘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구석자리는 남아 있어서 그곳에 앉았다.


     이곳은 창가자리다. 지난 봄과 여름 내내 이직을 위한 면접을 보러 다녔는데, 면접이 끝나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주위에 있는 커피빈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하나둘씩 모은 쿠폰이 어느새 6개월 동안 12개가 다 모여서 음료 한 잔을 공짜로 마실 수 있는 쿠폰이 생겼다. 따뜻한 커피가 먹고 싶었지만 지금 커피를 마시면 오늘 밤의 잠을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 모아둔 쿠폰을 사용해 차이라떼를 마셨다.


     차이라떼를 한 손에 들었다 놨다 하면서 지난번 부산여행에서 읽다가 만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잘 읽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소소한 웃음과 현실의 인간관계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들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그런데 어느샌가 영어가 아닌 외국어가 자꾸 들리길래 슬쩍 보니 가까운 테이블에 외국인 무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좋은 소음이야. 영어가 들리면 어설프게나마 이해가 되니 신경 쓰일 텐데 차라리 해석할 수 없는 프랑스어 같은 게 들리니 아예 외국에 온 느낌도 난다. 영화를 예매해 뒀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서 급하게 책을 읽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CGV에 가서 화장실에 들렀다 뭘 좀 먹어볼까 했는데 싱글세트엔 냄새나는 오징어랑 맥주를 묶어 팔아서 싱글세트 포기. 그렇다고 해서 메뉴에 맥주가 따로 없는 걸 보니 따로는 안 파는 거 같았다. 팝콘도 별로 안 당기고 해서 그냥 입장하려다가 바로 앞에서 나초를 파는 걸 보고 이 정도면 요기가 되겠다 싶어 나초를 구입했다. 손에 소스를 질질 다 묻혀가면서 곽에다 소스를 짜고 영화관에 입장했다.


     여의도 CGV는 새로 생겨서 좌석이 편하다. 게다가 웬일로 내가 앉은 라인엔 네 자리가 있었는데 나 빼고 아무도 안 앉았다. 다 취소했나 봐. 그래서 혼자서 이리저리 몸 움직이면서 편하게 봤다. 엄청 코믹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꽤나 감동적인 영화였다. 그리고 다시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약간의 의지도 생겼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환승센터로 걸어가고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마음속에서 울리는 멜로디가 있었다. 무슨 노래였지? 하며 제목을 떠올리는데 솔루션스의 <Talk, Dance, Party for Love>였다. 볼륨을 크게 키우고 듣는데 역시 좋다. 그리고 집에 다 와서 마지막으로 솔루션스의 <L.O.V.E>를 틀었다.


     원래 내리는 전 정류장에 내려와 동네의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왔다. 이 노래만 들으면 그렇게 명동에서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고 술도 안 마셨는데 반쯤 취한 기분으로 여름 초입의 명동 밤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의 느낌과 여름의 기억 그리고 두 번째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이 노래를 타고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지금은 분명 가을의 끝자락이고 그때와는 달리 날씨도 많이 쌀쌀해졌는데도 노래 하나가 나에게 온 여름을 끌고 왔다.


      오늘 본 영화는 <수상한 그녀>의 중국판인 <20세여 다시 한번>이라는 영화였다. 그런데 분명 내가 <수상한 그녀>를 극장에서 본 기억이 없는데도 줄거리가 술술 기억나면서 본 듯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올해 초 그러니까 1월에 두 번째 회사에서 킥오프 행사를 한답시고 강원도로 가는 버스 안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출발해서 가는 거라 직원들은 조용히 가고 싶어 하는데 눈치 없는(?) 기사님이 볼륨도 아주 크게 <수상한 그녀>를 틀어줬던 기억이 났다. 아무리 이 두 번째 회사에 애정 없이 다닌 2년이라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흔적을 남기는구나 싶었다.


     얼마 전, 이직에 성공해 세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래서 같이 일하게 된 지 얼마 안 된 아직 나를 잘 모르는 상사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같은 팀에서 일하는 동료의 좋은 점을 보고 배우라는 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시간이 지나니 그렇게 들었던 말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저녁에 야근을 위해 분식을 사 와서 캔틴에서 다 같이 먹다가 상사분이 나보고 '일을 참 똑 부러지게 하시네요'라는 말을 했다. 나에게 하는 소린가? 싶었다가 여태까지 상사가 날 좋게 본 기억이 없었고 바로 그 직전에 다른 직원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나는 '누구요? 아까 그 직원이요?'라고 했더니 '아뇨, 대리님(나)이요'라고 했다. (이 분은 아래 글에 나오는 전() 상사로, 몇 년 뒤 다른 회사로 이직한 뒤 나에게 스카우트를 제의하셨다.)





      재무팀은 숫자 다루는 일을 하니까 같은 직원이라도 공개하지 말아야 할 정보들이 있다. 그런데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낮에 보낸 자료에 보여서는 안 될 숫자가 있어서 좀 뭣한 상황이 됐었다. 어쨌든 그 일은 어찌어찌 수습이 되었고 나는 그 일을 정리해서 메일로 보고 드렸다. 그걸 좋게 보신 건가 싶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지난달 마감 때 상사가 나한테 보낸 걸 비슷하게 바꿔서 보낸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보다 내가 낮에 실수를 했다고 자백하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화제가 그쪽으로 쏠렸고 칭찬을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벌써 오래전 일 같지만 직전 회사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 주간회의 시간에 서로 되지도 않는 칭찬을 억지로 짜내서 했었는데'라는 생각. 바로 이전 직장이었던 두 번째 회사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주간회의를 했다. 그런데 주간회의의 마지막 순서로 구체적 사례를 들며 부서원 중 한 명을 꼭 칭찬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중엔 하다 하다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부서 사람들 칭찬까지 하라고 하더라.


      나는 이제 앞으로의 시간 동안 어떤 일들을 겪게 되고 미워하고 좋아하게 될까. 지금 이 현재는 미래에 어떤 과거로 기억될까. 지금 이 순간이 미래에 어떤 순간으로 떠올려지길 바라는가? 당시에는 어마어마해 보였던 일이 나중엔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놓쳤던 단서가 되어 미래에 그걸 발견할지도 모를 일.


     버스 정류장 한 정거장 전에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이젠 맥주가 어울리기도 약간 애매해진 가을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짧은 산책길에 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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