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에 관한 이야기

BGM <night whale>, 나루(naru)

by 세니seny

2014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올해, 2014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10살을 맞이하게 되었다. 축하축하! 6회 때부터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으니 대략 영화제 역사의 반 정도는 함께 해 온 것이다.


초창기 때는 제천 구경할 새도 없이 영화관에 갇혀 하루 종일 영화만 보기 일쑤였다. 그런데 해가 지나면서 다큐라던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류의 영화들이 늘어나서 결국 장편은 거의 안 보고 단편만 보다 보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덕분에 여유 있게 영화도 보고(+심야상영도 관람해 보고!) 제천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게 되었다. 올해도 단편이 주를 이뤘는데 워낙 편수도 많고 중간에 졸아서 대부분 기억 속을 스치듯 지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항상 패밀리 페스트 단편을 봤던 것 같다. 다른 영화와 겹친다면 무조건 이걸 본다. 왜냐면 이건 거의 한 타임밖에 상영하지 않거나 두 타임을 상영하더라도 결국 나에게 맞는 시간대는 일요일 아침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섹션 명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이, 청소년 관객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애니메이션 작품들도 많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품들도 많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이번엔 러닝타임이 짧은 게 많아 무려 열 편이나(!) 되었다. 그중에 트럼펫 같은 금관악기를 불면 음악에 따라 고래가 생기면서 점점 커지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있었다. 작품 자체도 단순히 음악의 즐거움이나 아름다움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서 사회현상을 대변하고 자기주장을 펼치는 내용이어서 나름 메시지도 있었다. 여기서 내가 꽂힌 건 '고래'였다.


얼마 전 나왔던 스타벅스 여름 MD는 스타벅스 한국지점 오픈 15주년을 맞이해 각종 물품들을 선보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고래의 이미지가 들어간 텀블러와 머그컵이었다.


’스타벅스'라는 이름 자체가 허먼 멜빌의 '백경(흰고래)'에 나오는 '스타벅'이라는 항해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며 스타벅스 로고 또한 바다의 파괴신(?)인 여신 사이렌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으니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머그컵도 예뻤지만 그것보다는 어두운 바다 빛깔을 띠는 남색 배경에 흰 고래가 그려져 있는 텀블러가 너무너무*100 예쁘고 마음에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사야지, 했는데 내가 MD 발매 사실을 알게 된 건 이미 발매 당일 저녁이었다. 그래도 지난번 벚꽃 MD도 하루인가 이틀 지나서 구했으니까 괜찮겠지? 했는데 내 눈에 예쁜 건 다른 사람 눈에도 예쁜 모양이다. 다음날 출근해서 회사 주변의 스타벅스 매장 3개 정도를 돌았지만 없었다. 깔끔하게 포기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이 난다.


고래 문양이 예쁘기도 했지만 그 텀블러를 봤을 때 가수 나루(naru) 2집의 <Night Whale>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현재는 밴드 솔루션스에서 기타를 치는 그 나루랑 동일인물이다. 좁은 방 안의 어두운 우주를 유영하는 고래. 그러고 보면 나루 2집 발매 공연이었나 그리 많지도 않은 관객 중에 2명인가 추첨해서 나루가 직접(!) 그린 선물을 주는 시간이 있었다.


아-주 가끔 당첨운이 따르는 나는 속으로 내심 내가 될 거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신은 나를 버렸다. 게다가 나루가 준비해 온 그림은 이미 추첨이 끝났는데 공연장 뒤편에 걸어 놓았던 그림까지 달라고 외치는 팬이 있어서 추첨을 한 번 더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안 됐다. 그때 그림 중에 하나가 바로 노래 <Night Whale>과 관련된 그림이었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방에 꼭 걸어두고 싶었는데 못 받아서 꽤 아쉬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제 심야상영에서 본 <베이비 벌룬>에서도 주인공인 비시가 쓴 노래 중에 가사에 고래가 등장하는 부분이 있었다. 짝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곡이었는데 맘에 들었었다. 정확한 가사가 기억나진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고래에 빗대 고래가 너무너무 작아서(tiny too tiny)라는 정도의 가사가 기억난다.


얼마 전 마음에 들어서 핸드폰에 저장해 둔 이미지가 있었는데 어두운 심해에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있는 그림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번 주 캘리그래피 동아리에서 액자를 만든다고 했는데 나는 고래를 그리고 <Night Whale> 가사의 일부를 적어야겠다. 그래서 방에 걸어두면 참 이쁠 것 같다. 똥손인 나에게도 고래는 그리기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돌고래는 우리 인간과 같은 포유류이고, 아이큐도 높은 편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고래에 빗댄 가사나 그림 같은 게 많은 걸까? 그래서 더 내 마음을 파고드는 걸까? 왜 요새 자꾸 고래가 내 눈에 띄고 내 마음을 흔드는 걸까? 이번 제천영화제는 최근 겪어오던 '고래'에 대해 생각해 본 좋은 계기가 되었다.



흔적 하나 없는 바로 어제처럼
오늘은 가고 두 신을 벗다 문득 발을 본다
누구 떠미는 이 없이 떠밀려온 하루
던져진 옷엔 미약한 내음조차 없는 것 같아

지구 어디에선 누군가의 눈물이 흐르네
아무도 모르게 뜨겁게

흔적 하나 없는 어둠 속의 천장
가만히 누워 아무런 의미 없는 생각들만
아리송함 뿐인 밤은 탄식이 아니고
찌푸린 두 눈 하지만 떠올릴 수 없는 시간뿐

지구 어디에서 넌 누비고 있을까 끝없이
온도와 빛도 없는 심해를

그대 나를 알고 있나 그대 나를 기억 하나
그대 나를 듣고 있나 그대 나를 보고 있나
그대 나를 그려 보나 여기 작은 나를

오늘도 나 꿈꾸네
그대와 나 누비네
오 나만의 바다
나만의 우주
내 좁디좁은 방 한 편의 꿈

날 감싼 모든 것들은 날 알 수 없겠지
나조차 이런 날 알 수 있을까


<Night Whale>, 나루(N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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