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니seny Aug 06. 2022

한국어라는 고유한 언어를 가진 것의 장점

익숙한 언어와 낯선 언어 사이를 넘나들며

<인간의 가장 강한 근육은 혓바닥이다>

모든 국민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국가들이 있다. 자신의 고유한 언어는 기내용 가방이나 화장품 파우치 깊숙한 곳에 넣고 다니면서 여행을 할 때나 낯선 나라에 갔을 때, 아니면 외국인에게 말을 걸 때만 영어를 사용하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영어를 그들은 구사한다.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들에게 영어는 진짜 언어다! 대부분은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기도 하다. 자신의 영어 실력에 의문을 품고 누군가에게 물어보거나 확인할 필요도 없다.

모든 설명서와 시시한 유행가 가사, 레스토랑의 메뉴, 사소한 전단지나 팸플릿, 엘리베이터의 버튼까지 전부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로 적힌 이 세상에서 과연 그들이 길을 잃고 당황하는 순간이 있을까? 그들의 입을 열기만 하면 매 순간 누구든지 다 알아듣고, 그들이 뭐라고 끼적이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 특별한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사람들은 무제한으로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에게, 모든 것에 열려 있다.

언젠가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고유한 소수자 언어를 갖도록 하는 프로젝트가 구상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사어를 그들에게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p. 271 인간의 가장 강한 근육은 혓바닥이다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 <방랑자들>을 빌렸다. 특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소설책이라 해야 할까? 한 장이 짧은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데 부담되지 않았고 일 년에 열흘 정도는 여행자의 감각으로 살아가는 나에겐 공감 가는 문장도 많았다.


     이 페이지를 읽고 전에 전화영어 수업을 하다가 어렴풋이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전화영어 수업은 미국인 선생님들로 운영되는 곳들도 있고 필리핀 선생님으로 운영되는 곳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가격적인 면에서 필리핀 선생님들이 수업하는 곳이 저렴하다. 미국인 원어민에게 배우는 것이 가장 정확한 영어를 배우는 거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가격이라는 문제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나 또한 필리핀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필리핀 선생님들은 외국 여행을 안 좋아한다고 하거나 해외여행을 못 가봤다는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선생님들이 해외에 나가기만 한하면 영어가 되니까 언어에 관해선 크게 불편함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을 텐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영어는 외국어이다 보니 말하는데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서 영어를 잘 못한다고 느끼면 걱정이 많아진다. (요즘은 번역 앱이 다 해줄 수도 있어서 그런 걱정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러나 영어를 모국어 혹은 모국어 수준으로 쓰고 있는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갈 수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영어가 되니까 어딜 가든 언어 문제는 걱정 없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안 통하면 물론 불편할 때가 많다. 그런데 내가 해외에 나가서 신기하면서도 재밌게 느끼는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그곳에 살러 간 것이 아닌 여행자로서는 낯선 언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꽤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해외에 나갔을 때 한국어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그걸 피한다.


     나는 현실을 피하려고 여행을 온 건데 한국어가 들리는 순간 누군지도 모를, 나와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 휘말리게 된다. 내가 아무리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해도 영어를 한국어만큼 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어가 들리면 당연히 귀가 쏠리게 돼서 그 이야기가 아주 선명하게 들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해외의 어느 낯선 곳이 아닌 서울 지하철 2호선에 탑승해서 8-2번 칸에서 떠드는 누군가의 전화 통화를 듣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리고 한국어가 들리면 귀가 자연스레 그곳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에 정신이 피로해진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나갔을 때 한국어를 듣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현실의 이야기들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서 영어 모국어 사용자들은 도망칠 곳이 없다. 나는 영어가 아닌 한국어라는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낯선 외국어에 둘러싸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대탐사 시대의 유럽 대륙의 사람들이 미지의 세계인 인도를 찾아 미대륙으로 갔듯이 또 새로운 행성인 달을 찾아 탐사하듯이 나는 그저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탐구하고 또 탐사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고통일 수도 있지만 재미나 보람도 있다.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지구 반대편의 언어가 가진, 우리말에 없는 개념을 해석하고 세계를 확장한다. 


     아무리 영어공부를 해도 잘 안되고 하기 싫으면 한국어만 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사서 고생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어라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 영어를 하면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열쇠를 쥐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모든 분야에 번역이 잘 되어 있어서 인터넷 브라우저도 알아서 번역이 되고 웬만한 책들도 많이 번역이 돼서 편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정보를 깊이 파고 들어갈수록 번역되어 있지 않은 정보도 많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국 가수를 좋아한다거나 요새 핫한 NFT 투자를 한다고 했을 때 내가 영어를 할 줄 안다면 제삼자를 거치지 않고 그 정보를 곧바로 해석해낼 수 있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영어로 가장 많고 풍부한 정보가 만들어져 있기(생각하기)때문에 어떤 학문이나 한 분야의 깊은 영역으로 들어가면 영어를 알고 모르는 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진 우리들은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낯선 언어인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힘듦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영어라는 홍수에 빠져 있다가도 잠시 그곳에서 빠져나와 고유한 언어인 한국어로 도망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을 언제든 기억하자. 도망갈 곳을 마련해두는 건 좀 비겁하긴 하지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은 것 아닐까? 영어와는 다른 사고 체계와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 한국어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전화 외국어 수업을 시작하다 (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