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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Jan 28. 2023

사무실 계단에 대한 단상

본래 목적 외에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는 계단에 대해

     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지하 3층, 지상 17층의 건물이다. 그중 내가 일하는 곳은 4층으로, 저층부에 속한다. 높은 층에서 근무하면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멋있는 뷰를 볼 텐데 저층부라 도로에서 빵빵대는 자동차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나마 엘리베이터가 붐빌 때는 계단을 이용하기에는 좋은 층이라 해두자. 서울엔 높은 빌딩들이 참 많지만 내가 여태까지 근무했던 곳 중에 제일 높았던 층은 14층이었다. 그 이후엔 9층 -> 7층 -> 7층 -> 4층까지 내려왔다.


     계단의 본래 목적은 층과 층을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건물 안에 있는 계단이 가지고 있는 본래 용도는 빌딩 높이가 비약적으로 높아짐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등장하면서 원래 기능은 거의 상실한 것 같다. 그래도 출근길이나 점심시간 전후 혹은 퇴근할 때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꽉 차서 탈 수 없으면 계단을 사용하긴 한다. 가끔 건강을 위해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상 시나 소방점검할 때도 계단을 이용한다.


     어쨌든 요즘 사무실의 계단은 본질적인 용도보다는 그 외에 다른 용도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먼저 우는 장소.


     두 번째 회사를 다닐 땐 참 많이 울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화장실에서 훌쩍거릴까 고민했으나 화장실은 나 혼자 쓰는 곳이 아니고 계속 직원들이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마주치면 꽤 민망하다. 내가 왜 울었는지를 설명해야 하고, 그럼 또 누구 때문에 울었네 하면서 사내에 쓸데없는 소문이 퍼질 테니까.

                       

     그래서 화장실 대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계단이었다. 어느 날, 우리 층과 바로 연결된 계단 말고 두어 층 정도 더 위로 올라가서 다른 회사와 연결된 계단에 서서 훌쩍 대고 있었는데 저어~기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계단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팀에서 같이 일하던 부장님들이었는데 그분들은 수다를 떨면서 담배나 한 대 피우러 나가려고 계단으로 나오신 거였다. 


     계단에서 대화를 하니 소리가 웅웅 거려서 정확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회사나 임원을 욕하는 내용으로 추측되어서 혼자서 큭큭대며 위로를 받았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분들도 힘든 거구나. 사회경력 짬밥 적은 내가 힘든 건 당연한 거구나.


     또 언젠가 한 번은 그런 날이 있었다. 그날도 뭔가 힘든 일이 있어서 속에서부터 울음이 올라오길래 아예 실컷 울려고 계단으로 나가던 길이었다. 이 건물엔 우리 회사만 있는 건 아니었고 우리는 한 층만 쓰고 나머지는 전부 다른 회사였기 때문에 계단으로 나가서 바로 거기서 울지 않고 아예 위로 올라가서, 즉 다른 회사 쪽에서 나오는 입구가 있는 계단에서 울곤 했었다. 회사 사람들 중에서도 가끔 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절대 아래쪽으로는 내려가지 않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울다가 다른 회사 사람 마주치는 건 피차 모르는 얼굴이라 상관없었으니까.


     그래서 우리 층 계단으로 나가서 거기서부터 한 두세 층 정도 올라가려고 고개를 딱 들고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는데, 아뿔싸, 이미 거기 서있던 내가 알고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분은 높은 직급을 가진 다른 부서의 책임자였다. 그런데 그분은 거기 서서 연기를 뻑뻑 품어대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하하.    

                                  

     건물 내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경고문을 봐도 설마 누가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겠어? 했는데 진짜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경고문이 붙어있었던 거였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깜짝 놀란 그분은 황급히 입에서 담배를 빼서 꺼트렸고 나는 눈을 피해서 다시 뒤를 돌아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왔다.


     그 뒤로 우리 둘은 복도에서 서로 마주쳐도 인사만 하고 이 일에 대해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진 것일까. 서로 그러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분은 뭐가 되었든 그 화제를 꺼내기가 민망했겠지? 참고로 나는 내 이름 안 남기고 그 회사에서 빨리 사라지기가 목표였기 때문에 분란 일으키지 않고 모든 걸 조용히 흘려보내고자 했으므로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분은 나랑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도 그 이후에도 거기서 담배를 계속 피우셨을까? 궁금해지네.



     두 번째 용도는 만남의 장소.


네이버웹툰 <조조코믹스>, 이동건. '안 하던 짓' 7화 중 3컷.



     계단의 또 다른 용도는 이처럼 '만남' 아닐까 한다. 드라마나 웹툰에서는 사내 연애하는 커플들이 많이 이용하는 장소로 계단이 등장하곤 한다. 나는 아직까지 계단에서 사내 연애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는데,라고 쓰다가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우리 회사 화장실에서 보이는 풍경은 꽤 좋은 편이다. 아마 내 자리는 창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화장실에선 마치 뉴욕 타임스퀘어를 연상케 하는 각종 대형 광고판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꼭 별세계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심즈나 롤러코스터 타이쿤 같은 게임에서 마치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는 설계자가 된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를 닦을 땐 주로 창가에 서서 이를 닦으며 바깥 풍경을 보곤 한다. 이때 정면의 대형 광고판 말고 오른편으로는 다른 회사 건물도 보인다. 우리 회사 건물 옆에 있는 이 건물은 외벽이 안이 들여다보는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어서 사무실은 물론이고 계단을 이용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잘 보인다. 그래도 사무실은 블라인드로 가려놓아서 잘 안 보이는데 계단이 있는 복도는 아무런 장치가 없어서 계단으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다 보인다. 그래서 그 계단에 서있던 남녀 둘은 아무도 보는 줄 모르고 그랬겠지만 나는 점심 먹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으면서 둘이 꽁냥대는 모습을 다 지켜봤다 이거야.

                                           

     만약 내가 사내연애를 한다면 나라도 한 번쯤은 이용할지도 모르겠다. 회사마다 다르긴 한데, 어떤 회사는 계단에 불도 잘 들어오고 밝아서 사람들이 계단을 많이 쓰는 반면 어떤 회사는 계단 쪽에 불도 잘 안 들어오고 사람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는 회사들도 있다. 계단을 잘 안 쓰는 회사라면 밀회의 장소로 딱일 거 같긴 하다. 혹은 험담의 장소로도.





     

     계단의 기본 목적은 안과 밖을, 층과 층을 연결해 주는 통로다. 요즘엔 로비 중앙에 계단이 떡하니 놓여있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과시용(?) 계단 말고 일반적인 계단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드러나있기보단 대부분 건물 한 편에 조용히 숨겨져 있다.


     회사의 거의 모든 공간은 공용공간이다. 임원들이야 대부분 방이 있으니까 잠시라도 혼자서 시간을 보낼 공간이 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파티션(가림막)이 처진 책상에 앉아 뒷사람과는 등을 맞대고 옆사람과는 나의 오른쪽/왼쪽 공간을 공유하며 하루를 보낸다. 파티션이라도 있음 다행인데 요즘은 사무실 공간의 효율화와 다른 팀의 팀원들과도 어울려 일하라는 소통이라는 취지 아래 고정된 자리 없이 독서실처럼 매일 자리를 예약해서 새로운 자리에서 일을 하거나 아예 파티션을 없앤 책상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다. 그 외 회의실, 캔틴, 화장실도 전부 공용공간이다.


     그런데 층을 오르내린다는 가장 본질적인 역할을 엘리베이터에 빼앗겨 이제는 잃어버린 장소가 되어버린 곳, 소방훈련할 때나 엘리베이터가 너무 붐비는데 지각하게 생겼을 때만 이용하는 장소인 계단이 회사에서 혼자 있을 만한, 사적인 장소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기쁘지만 회사에서 들키지 말아야 할 모습-예를 들면 사내연애-과 슬퍼서 들키지 말아야 할 일-울면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올 때-을 위해 이용되는 이중성을 지닌 게 아닐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아무튼 계단 너 말이야, 그동안 지각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네 덕분에 슬플 때 잠시 눈물 뚝뚝 흘리고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 마음 다잡고 일할 수 있었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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