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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Dec 04. 2022

서울탐방 제3탄 : 비화를 간직한 길상사 산책

2022년 5월의 기록

     올봄엔 서울 시내에 있는 많은 절에 가봤다. 4월 초의 조계사, 4월 말의 봉은사 그리고 오늘 다녀온 5월 초의 길상사까지. 1년 중 절이 가장 화려한 시기인 부처님 오신 날 즈음 다녀와서 그런지 어느 절이든 갈 때마다 형형색색의 연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눈에 가득 담고 왔다. 그중에 오늘은 길상사를 다녀온 기억을 풀어본다.






     길상사는 꽤 유명한 비화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본래 요정(고급 술집)이 있던 자리였고 그 요정을 운영하던 기생 자야가 젊은 시절 백석 시인과 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사실이 아니라는 글도 많다) 하지만 기생이라는 자야의 출신 성분을 이유로 가족의 반대가 심해 백석 시인과 헤어지게 되었고 그 사이 남북이 분단되면서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급 요정의 소유주였던 자야가 이 부지를 절에 시주하면서 길상사라는 절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번 주말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 주말엔 사람이 많을 거 같았다. 그래서 평일인 오늘 휴가를 내고 가기로 했다. 한성대입구역 근처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길상사로 올라간다. 마을버스가 오자마자 버스정류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버스만을 기다렸다는 듯 몰려든다.


     오늘의 원래 목표는 길상사도 구경하고 길상사 안에 있는 다원에서 글을 좀 써볼까 하는 거였다. 다원에 책도 전시되어 있는 것이 꼭 일반적인 북카페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성대입구역에서 이 자그마한 마을버스에 많은 사람이 타는 걸 보고 그제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있으니 절에 사람이 많겠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가서 상황을 보고 사람이 너무 많으면 근처의 다른 카페로 가기로 했다.



길상사 풍경 (2022.05)



     버스에서 내려 절 입구로 향한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입장했다. 오른편에 있는 탑에서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고 대웅전 쪽으로 갔다. 대웅전을 지나 왼편에 마련된 산책길로 경내를 걸었다. 물도 흘렀고 나무가 적당히 우거졌으며 곳곳에 의자도 있어서 산책하기 좋았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가장 위쪽에 건물이 하나 더 나왔고 그곳을 기점으로 해서 다시 돌아서 천천히 걸으며 내려왔다. 



길상사 풍경 (2022.05)



    그러고 나서 입구 쪽에 있는 다원에 가봤지만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밖에서 슬쩍 들여다보니 책도 좀 있고 테이블 사이 간격도 널찍널찍해 보이고 좋아 보였는데 아쉽지만 다음에 한 번 더 오기로 다짐한다. 


     주위에 갈만한 카페가 있나 찾아보다가 북카페라고 검색하니 1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북카페가 있었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버스 노선이 없어서 걸어가야 했는데 1km 정도야 얼마든지 걸을 수 있지, 라며 자신만만하게 절을 나와 길을 나섰다.


     그런데 갈수록 길이 점점 이상해진다. 언덕진 길인건 잘 알겠는데 조금 걷고 나니 도보가 스리슬쩍 없어졌다. 완전 차만 다니는 길이다. 망했다. 그렇다고 다시 뒤돌아 갈 수도 없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도를 따라 최대한 구석에서 걸어가기로 했다.


     이건 마치 해외에서 현지 지리도 모르면서 무작정 구글맵을 켜고 무모하게 걷는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오지에서 없는 길 뚫어서 가는 느낌. 택시를 부를 생각도 못했다. 가구박물관을 지나서 걷다 보니 애매한 사거리가 보였다.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되나 또 저 사거리에서 갈림길 중 어느 길로 들어서야 할지 확인할 겸 지도 앱을 켰다.


     아직도 지도상으로 1km 정도는 더 가야 하는데 여긴 아무리 봐도 사람이 걸어 다닐만한 길이 아니었다. 산 중턱이라 길도 구불구불 굽이쳐 있어서 차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눈앞 사거리 근처 모퉁이에 카페가 하나 보였다. 


     원래 가고자 했던 카페까지 차도를 따라 이대로 걸어가는 건 나의 무모한 욕심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차도를 걷다 치여도 할 말이 없다. 또 이렇게 걸어서 카페에 도착했다고 해도 돌아오는 길도 걱정이었다. 오늘은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고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인 그 카페에 들어갔다. 


     하는 수 없이 들어온 카페였는데 괜찮았다. 개인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장에게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느낄 수 없는 친절함이 있다. 카페 주인이 동물을 좋아하시는지 동물 입장이 허용되는 카페여서 내 뒤편에는 고양이를 데리고 오신 분도 있었다.


     시원한 음료를 시켜놓고 자리에 앉았다. 2층도 있는 거 같았지만 그냥 1층에 바깥과 통하는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는 남자 한 분과 여자 한 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특히 여성분의 목소리가 큰 탓에 그들의 대화는 내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렸다. 그 둘은 아빠와 딸 사이였다. 아마 딸은 나보다 10살 정도는 어린 듯했고 그에 따라 그녀 아빠의 연배도 우리 아빠보다 못해도 10살은 젊을 것 같았다. 엄마 없이 그것도 평일 오후에 아빠랑 단 둘이 카페에 오다니, 우리 집 부녀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조금 부러웠다.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그녀는 대학생 혹은 사회초년생인 것 같았다. 슬쩍 들은 바로는 일과 커리어에 대해 굉장히 욕심이 많아 보였다. 나중에 개발자 친구들을 모아 사업을 해서 성공하고 싶다고 했다. 사회생활을 좀 해 본 듯한 아버지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자기 주위에 있는 여자애들은 야망이 없고 시집 잘 가는 게 목표인 애들이 대부분이라 하며 현실을 개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보다 10년도 더 어린애들이 아직도 '시집 잘 가는 게 목표'라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갈 길이 멀구나.


      내가 항상 북카페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나의 시간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굳이 듣고 싶지 않아서이다. 적어도 북카페에서는 대화를 해도 조용조용 떠드는 분위기니까. 그래서 오늘도 굳이 길상사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서 차를 타거나 걸어가야만 하는 북카페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연찮게 들어온 카페에서 들은 이 부녀의 이야기도 재밌었다. 나도 그녀처럼 반짝거리던 꿈을 향해 좇던 20대가 있었나? 그런 시절이 없어서 지금이 그 결과인 건가?

  

     분명, 반짝거리긴 했을 거다. 뭐라도 할 수 있었고 실패해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스쳐 지나갔고 그중에 한둘이 조금 더 긴 인연이 되기도 하던, 빛났던 20대. 하지만 나는 그때도 무엇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목표가 없어도 사람이 살아지긴 하더라.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도 큰 목표 없이 살고 있다.


     없는 목표를 갑자기 쥐어짜 낸다고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목표를 세워보고 그것을 향해 달려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목표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그래도 목표가 있다면 덜 방황하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집중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 앞자리에서 열심히 대화를 나누던 부녀는 사라졌고 나는 그제야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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