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안아줘요>, 10cm (십센치)
비 오는 날 어느 그날 밤
같은 우산 아래 약속한
주기로 했던 거 잊었나요
힘이 들고 어지러운 날
내가 비틀비틀거리면
주기로 했던 거 잊었나요
줘요 주세요 지금 달라니까요
줘요 주세요 그냥 달라니까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달라니까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달라니까요
출근부터 퇴근 때까지
나를 미워하는 상사의
싫은 소릴 줄창 들었어요
울음보가 터지기 전에
커피 한 잔 하고 싶은데
불러 낼 사람 하나 없어요
줘요 주세요 지금 달라니까요
줘요 주세요 그냥 달라니까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달라니까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줘요 안아달라니까요
허리가 끊어지도록
쇄골이 부서지도록
뒷목이 뻐근하도록
온몸이 빨개지도록
안아 안아 안아 달라니까요
안아 안아 안아 달라니까요
안아 안아 안아 달라니까요
안아 안아
<안아줘요>, 10cm (십센치)
나는 힘든 일이 생겨도 처음부터 말을 하는 편이 아니다. 왜냐면 나는 상대방으로부터 고민이나 어려움을 듣는 경우, 나한테 심적으로 의지하고 있어서 말해줬구나 하고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한테 고스란히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전이되는 편이라 같이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 경우를 비춰봤을 때, 결국 나의 힘든 일은 잘 말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은 참 징징대고 싶었다?
어제는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매월 둘째 영업일. 그래, 다 알고 있다. 이 일 해온 지 십 년이 넘었으니. 그래도 평상시에는 10시 정도엔 끝났는데 어제는 여차 저차 해서 일이 늦어져버렸고 정말 오랜만에 거의 밤 12시까지 야근을 했다.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온 것도 나다.
게다가 어제부터 이상하게 종아리가 너무 당겼다. 일요일에 등산을 다녀와서 좀 뻐근한 건가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피곤에 지친 몸과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갔다. 요즘 택시가 잘 안 잡혀서 걱정했다. 택시가 안 잡히면 어제처럼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오늘은 시간이 시간인지라 버스가 곧 끊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택시가 잡혔다.
야근하고 온 날은 참 피곤한데 그렇다고 해서 집에 가자마자 잠을 자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부작 사부작대며 뭔가를 하는데 이건 나만 그런 걸까? 회사에서 지탱해 오던 긴장감이 바로 사그라들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오늘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오로지 '나'를 위해 쓴 시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쓸데없는 일이라도 좋으니 단 5분이라도 시간의 주인이 오로지 내가 되도록 애를 써서 그런 걸까?
어제 역시도 그랬지만 평소보다 더 했던 거 같다.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내리니 콜택시 어플에 자동으로 등록해 놓은 법인카드로 요금이 결제되었고 곧바로 문자로 결제내역 알림이 왔는데 그 문자가 온 정확한 시간이 0시였다. 나는 어젯밤에 퇴근했지만 과학적으로는 다음날인 오늘에서야 집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집에 들어가 먼저 손을 씻고 세수를 하려다 할 일이 생각났다. 주말에 엄마가 먹으라고 갖다 준 꽃게 찌개를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못 먹어서 상하기 전에 한번 끓여 놓아야 했다. 그래서 부엌에 갔더니 싱크대에 설거지를 기다리고 있는 그릇이 눈에 띈다. 그래, 오늘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이렇게까지 늦게 퇴근할 줄은 모르고 설거지를 남겨뒀겠지. 가스레인지에 꽃게 찌개를 올려놓는 김에 몇 개 되지 않는 설거지 거리를 해치운다. 속이 다 시원하다.
다음날 아니 이제 몇 시간 뒤의 오늘의 출근을 위해 이제 씻고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아직 말똥말똥한 정신에 약간의 고집이 더해져서 오늘만큼은 이 집안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하지만 3년째 입지 못하고 있는 수영복을 꼭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내일 퇴근하고 저녁에 곧바로 수영장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눕는 게 아니라 옷장을 열고 서랍을 뒤지며 수영복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코로나도 조금 잠잠해졌고 해서 수영을 다시 다녀볼까 했는데 코로나 이전에 입던 수영복과 물안경 등 각종 수영 물품을 어디에 놨는지 모를 지경이 된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이사도 두 번이나 했지만...)
어디다 뒀는지 전혀 감이 안 와서 찾는데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찾았다. 결과적으로는 본가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있었다. 수영복은 지난 3년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삭지 않아서 입을만했다. 장기적으로는 예쁜 무늬로 된 수영복을 새로 살 거지만.
꽃게 찌개 다시 끓이기, 설거지하기, 수영복 찾기라는 난해하고 연결고리도 없는 세 가지 일을 다 해치웠다. 이제야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씻고 자려고 침대에 올랐다. 그런데 어라? 다리가 좀 이상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긴 한데 어디가 이상한 건지 바로 설명할 수 없었다. 가만히 두 다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알겠다. 발목을 비롯한 종아리 전체가 엄청나게 부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평소에 다리가 붓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이것과 똑같은 내 다리를 본 적이 있었다. 재작년에 발가락이 부러져서 깁스를 해서 다리가 땡땡 부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와 똑같은 상태였다. 당시 발목을 꽉 조이는 깁스 때문에 피가 쏠려서 종아리와 발목이 엄청 부어 있었는데 그때 많이 봤던 풍경이었기 때문에 눈에 익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자기주장을 하며 종아리와 발 사이에 또렷하게 솟아있던 발목의 복숭아뼈가 부어버린 살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급히 다리를 두들기고 주물렀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거꾸로 누워서 그러니까 침대 머리맡 베드에 다리를 올려서 다리를 심장보다 높게 해 놓고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조금 나아진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출근해서 또 스트레스를 받고 사무실 의자에 계속 앉아있다 보니 결국 어제와 똑같아졌다. 하루 종일 다리가 저리고 딱딱하고 불편했다. 그 와중에 오늘까지 참 바쁜 날이라 쉴 틈 없이 일했다.
어제 야근하면서 팀원들끼리 저녁 먹는 자리에서 누군가 꺼낸 이야기. A팀의 누구누구는 MBA를 다닌다고 한다. 어쩐지, 요즘 칼퇴하고 무슨 공부한다는 소문이 있더니. 그런데 그 사람 말고도 그 팀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도 또 다른 팀의 누구도 MBA를 다닌다네? 요즘 MBA가 유행인가? 회사가 날 평생 먹여 살려줄 것도 아니니까 자기 계발하는 것도 좋지만 회사 업무 적응도 안된 거 같은데 MBA를 다니는 게 맞는 건가?
자기 노력 쏟고 시간 들이고 돈 내가면서 하는 거겠지만-본인 대학원 학비는 세액공제가 된다-나는 다리 퉁퉁 부어가면서, 부은 다리 하나 제대로 풀어주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이러고 앉았는데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다. 현타가 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데다 이런 것들이 모두 맞물려 징징대고 싶어진 것이다. 징징댄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다 필요 없고, 누가 뭐래도 그저 징징대고 싶어졌다.
나 다리 아프다고!!!
퉁퉁 부어서 찌릿찌릿하고 각목같이 굳었다고. 저 멀리 떨어진 복합기에 프린터물 집으러 걸어 다니는데도 너무너무 불편하다고.
우리 팀도 프린트 많이 하고 나름 confidential한 자료를 다루는 팀이니까 가까운데 프린터 좀 놔달라고 의견을 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같은 본부 안에 있는 팀인데도 이상하게 좀 더 편애를 받는 인사팀에만 프린터와 파쇄기를 따로 놔준 본부장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다시금 솟아올랐다.
종아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굳어버린 느낌이라고. 복숭아뼈 발목이 보이지 않는 내 발목이 영 남의 발목 같고 이상하다고. 진짜 내 발목은 여기가 아니라 어디 저-어기에 따로 돌아다니는 거 같다고.
잔혹동화 '빨간 구두'중에 빨간 구두를 신으면 춤을 멈출 수가 없어서 결국 발목을 잘랐는데도 구두가 신겨진 발목은 끝까지 돌아다니며 춤을 췄다는 그 발목처럼.
퇴근길에 이 노래를 들었다. 십센치가 이렇게 잘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십 년도 더 전에 홍대씬에서는 조금 유명했지만 아직 세상이 십센치를 모를 때, 홍대에 있는 클럽에서 여러 팀들과 함께 하는 공연을 볼 때 소리를 꽥꽥 지르며 <스타킹> 가사를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가사를 들으면서 진짜 관점 독특하다, 다른 방식으로 재밌네 생각했던 팀이 역시나 그 특유의 감성과 관점으로 어느새 메이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십센치의 노래는 '피식'하면서 듣게 된다. 찌질한 귀여움. 권정열이 그런 포인트를 참 잘 아는 거 같다. <안아줘요>는 민트페이퍼에서 만든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곡이다. 십 년 전인 그때도 컴필레이션 앨범은 꽤 드문 편이었는데 요즘은 본 기억이 거의 없는 거 같다. 그래도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GMF)을 주최하는 민트페이퍼인 만큼 많은 밴드들을 군집시켜서 하는 이런 기획 하나는 잘하는 거 같다. 그 앨범에 실린 다른 곡들도 좋다.
집으로 돌아와 후딱 손만 씻고 밥을 짓는다. 살림을 하면서 깨달은 것 하나는 화장을 지운 직후 곧바로 쌀을 씻지는 말아야겠다는 사실. 왜냐하면 화장을 지우고 나면 얼굴에 로션을 바르게 되는데 로션을 바르고 난 직후엔 아직 손에 로션의 끈적임과 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 손으로 쌀을 씻거나 식재료를 만지면 아무래도 로션이 식료품에 묻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엄마들이 화장을 아예 안 하게 되는 걸까?
씻는 동안 밥도 다 되었고 어제저녁에 끓여 놓아서 아직 상하지 않은 꽃게 찌개를 다시 데워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이 종아리의 부기가 영원히 빠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을 안고서 침대에 오른다. 보통 같으면 '침대에 눕는다'라는 표현을 쓰겠지만 오늘도 침대 머리맡에 다리를 올려놓는 기이한 자세로 잠을 자야 하므로 어쩐지 오늘은 '침대에 오르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발목의 부기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종아리의 부기는 쭉 빠져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종아리의 찌릿찌릿함과 딱딱함도 함께 사라졌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러니 이제 그만 징징대고, 다시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