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감상기
2015년 6월 어느 날의 일기.
이런 날은 마땅히 버스를 타야 하지만 나는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인 관계로 집에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렇다고 명동역에서 지하철 타면 갈아타야 하니 것도 귀찮고 해서 이 기분을 좀 더 음미하고자 갈아타지 않고 집까지 가는 2호선을 탈 수 있는 을지로 3가 역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잘한 선택이었다.
영화 감상을 담은 짧은 트윗을 날려놓고 요즘 꽂힌 솔루션스의 <L.O.V.E>를 들으며 걸었다. 마음을 파고드는 기타 뜯는 소리가 지금의 분위기와 마음과 너무 잘 어울린다. 사실 이 영화는 지난주에 별다른 정보 없이 이동진 님이 진행하는 라이브톡을 예매했는데 갑자기 잡힌 면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소했다.
그러고 다시 볼까 말까 생각 중이었는데 관람객 평이 너무 좋아서 라이브톡은 놓쳤지만 이번 주 내내 극장을 돌며 GV를 하고 있길래 급하게 예매를 했다. 새로 생긴 CGV 명동씨네라이브러리에는 처음 와봤는데 GV 할 때 빼곤 장소 오픈을 안 하는 거 같은 게 아쉬웠다.
영화는 1,2부로 또 흑백으로 칼라로 나뉜다. 1부는 살짝 지루할 수도 있었는데 일본어 학습자 개인으로서는 일본어로 대화 나누는 장면들을 통역하고 보는 재미도 있었다. 저 정도면 나도 하겠다? 이런 근자감과 함께.
본격적인 영화는 2부부터 시작한다. 1부에서 흘러나왔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장소들, 시청 직원이 한 이야기들이 여러모로 조합되어 새로운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배우는 동일인물인 거 같았고(하지만 내가 원래 이런 눈썰미가 없는 편이라 계속 알쏭달쏭했다) 남배우는 완전 다른 사람인 거 같은데 계속 보는데도 잘 모르겠는 거다. 물론 1,2부를 아예 다른 사람이 연기할 수도 있지만 여기 흐름상 그게 아닌 거 같고 영화 홍보할 때 나오는 배우 숫자도 1,2부를 나눠서 연기할 만큼 많지 않았단 말이지.
2부엔 1부에 나왔던 사소한 단서들이 버무려져서 그걸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도 내일로 여행하면서 이런 비슷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공감했다.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적어도 현실세계에서 1cm 정도 붕붕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최근의 내가 많은 생각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있었다. 누구들은 연애하고 결혼하고 다들 그렇게 잘 사는 거 같은데 나는 빙구같이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렇게 이기적이면서 뭘 바라는 건 더 이기적이겠지. 다른 누군가에겐 엄청나게 쉬운 문제여도 나에겐 어려운 문제다.
가만 생각해 보니 면접도 그렇고 나는 뭔가 주어진 상황에서 나를 '어필'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타입이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선 어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이상도, 없는 것도 만들어 보여주곤 하는데 난 최소한도 보여주지 못하는 거 같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선, 한 번 스치고 말 사이에선 그럴 필요가 없지. 나는 그냥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서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타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GV는 상영관이 아닌 씨네라이브러리로 옮겨서 진행했다. 김혜리 기자가 30분 정도 썰을 풀면서 여러 가지 질문도 하고 얘기를 들었다. 장건재 감독님이 말은 많은 타입인지 엄청 입을 터셨다. 영화 안에서 감독 역할을 맡은 임형국 배우는 비중이 그리 크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센스 있는 발언으로 나를(아마도 우리 모두를?) 즐겁게 했다. 김새벽 배우는 역시 배우라 연기도 잘하셨지만 목소리가 참 좋았다.
주로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여배우들은 주위에 있을 법하면서도 성형수술을 크게 하지 않아서 자연스러운 얼굴이다. 나는 그런 게 좋다. 그리고 원래 일본어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라니 진짜 대단한 거 같다. 남자 주인공 역할의 배우 이와세 료는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서 깜놀했다. 1부와 2부의 유스케를 아예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하니 내가 못 알아본 게 이해가 갔다. 완전 다른 사람이었거든.
질문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영화 개봉한 지 1주일 밖에 안 됐는데 벌써 3번씩이나 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아무리도 좋아도 바로 연달아 두 번은 보기 힘들더라.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는 볼 수 있지만 영화를 바로 그 직후는 잘 안 되더라. 아무튼 자극적인 영화가 넘치는 시대에 잔잔하면서도 작은 울림을 주는 따뜻한 그리고 날 더 외롭게 만드는 잔인한 영화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도 이어폰 저 너머로 들려오는 어느 여자의 통화하는 큰 목소리. "뭐? 비가 온다고? 많이 와?"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어디 부산에 있는 사람이랑 통화하겠지, 싶어 그 말은 흘려듣고 동네 지하철역에서 내려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강해진다. 빗줄기야. 엄-청나게 세진 않았지만 꽤나 쏟아지고 있다. 다행히 횡단보도만 건너면 버스정류장에는 비막이가 설치되어 있었고 버스가 금방 와서 바로 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집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평소 비 맞는 걸 싫어하는 나였지만 오늘은 비 맞을 생각을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약간 센티해져서 그런 걸까. 그래, 뭐, 이까짓 비 맞아주지. 비 맞는 거 싫어하는 내가 언제 이렇게 기분 좋게 비를 맞겠냐고. 그러니 한 번쯤은 빗 속에서 뛰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머리 위 나무줄기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그렇게 천천히 걸어 집으로 왔다.
머릿속엔 여태 이 한 곡만, 줄곧 재생해서 듣고 온 솔루션스의 <L.O.V.E>의 리듬이 흐르고 마음엔 닿을랑 말랑한 그 어색함과 두근거림이 함께 뛰고 있다. 여름은 사실 무덥고 짜증 나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이면엔 여름 초입의 싱그러움과 또 다른 계절이 시작한다는 설렘이 있다. 그리고 한여름의 밤은 대체로 어떻든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나루의 <June song>이 그렇게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 <June song>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들어야겠다. 안 그러면 또 내년을 기약해야 하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