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것도 없는데 시간만 흐르고 있다
주말 내내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찜찜했기에 출근하자마자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고 좀 보자고 했다. 흔쾌히 오라길래 좀 이따 가마하고 자리로 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얘기는 길어지고 결론은 오묘하게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몰아가더라. 아니, 교묘하게 자료 승인받아놓은 게 누군데. 진 다 빼고 났더니 오전이 다 갔다. 오후에는 그나마 정신 차리고 인수인계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영업사원 전화 와, 재택근무하는 직원 중간중간 전화 달라고 메시지 와, 채권추심해야 되는 거래처 때문에 뭐 확인해 달라고 또 연락 와...
결국 해야 될 일은 하나도 못하고 팀원들은 다 퇴근했는데 나만 또 야근하고 앉았다. 주 35시간제를 외치던 나만 야근하고 있으니 이것 참 아이러니하지.
그래서 나는 팀장이란 보직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아무리 좋고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해도 나한테 안 좋으면 그만인 것을.
처음부터, 이 제의를 받았던 세 달 전부터 거절했어야 맞는 걸까? 그러면 그동안 새로운 팀장을 뽑는 절차를 밟았을 테고 지금쯤이면 새로운 사람이 왔겠지?
대신 막내는 계속 막내인 상태일 테니 죽으나 사나 그 일만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고 탈주 준비를 가속화했겠지. 그리고 나는 예전처럼 내 할 일만 딱하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정시에 퇴근하는, 퇴근하고 나면 더 이상 회사일을 머릿속으로 생각하지 않는, 여전히 이직자리를 꿈꾸며 잡사이트를 뒤지는 그런 팀원이었겠지.
일을 마치고 나니 거의 7시가 다 되었다. 퇴근 전에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참고로 회사의 그 어느 자리보다-대표이사실을 제외하고-화장실에서 보이는 바깥풍경이 제일 좋다. 우리 사무실은 낮은 층에 있지만 건물은 대로변의 큰 사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시야가 탁 트여있기 때문이다.
이제 해 떨어지는 시간이 확실히 빨라져 바깥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런데 빌딩 숲 밤하늘 한가운데 초승달이 뙇! 그림처럼 걸려있다. 아아, 바나나 마냥 하늘의 초승달을 똑 따서 까먹고 싶네.
이대로 곧 퇴근할 생각이었다. 원래는 지하로 내려가서 바로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아니다. 밥은 조금 더 있다 먹어도 돼. 저걸 내 눈으로 회사 밖에서 봐야겠어. 얼른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