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서서 멍하니 초승달 바라보기
얼른 짐을 싸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1층에 내려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어라? 아까만큼 달이 잘 보이지 않네? 그렇다. 우리 회사 화장실, 바로 그곳이 달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아래로 내려오니 건물의 각도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걸으면서 달이 잘 보이는 위치를 찾는다.
이 정도면 되겠어. 하지만 그리 좋은 스폿은 아니었다. 마침 사거리에서 큰 공사를 하고 있어서 마치 석유를 시추할 때 쓸 법한 큰 기둥들이 여러 개 난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 말고도 얇고 긴 원통형 막대들도 여기저기 수직으로 꽂아져 있어 시야를 방해했다. 참으로 언밸런스한 풍경. 공사판과 빌딩숲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빌딩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의 초승달 한 점.
다들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는데 나만 거기 가만히 서있었다. 누굴 기다리는 것도 아니면서 기다리는 것 마냥. 그렇게 혼자 고요하게 서서 페퍼톤스 1집에 실린 <high romance>를 들었다. 그냥 이 시간대와 이 분위기에는 이 노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들었는데 알맞은 선곡이었다. 노래가 흐르는 약 5분가량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멍하게 달만 바라보았다.
맨날 초승달과 그믐달이 헷갈려서 내가 본 게 초승달이 맞나 하고 검색하다가 발견한 기사. 그러고 보니 이제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초승달이어야 논리적으로 맞다.
초승달은
잰 며느리가 본다.
슬기롭고 민첩한 사람만이 미세한 것을 본다는 뜻이라고 한다. 초승달을 발견한 나는 슬기롭고 민첩한 사람인 걸까?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넘쳐나는 이 도시에서 아무 목적도 없이 가만히 서서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는 하등 쓸모없는 사람인 걸까?
저녁을 사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안에 쌓인 독을 꺼내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다. 오늘은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무리 호기를 부려봤자 결국 집으로 걸어 돌아올 것까지 계산해야 되니 30분 정도 갔다가 오겠지만. 그래도 이사 와서 아마 제일 멀리 가게 될 날인 것은 분명했다.
저 멀리 보이는 타워팰리스를 바라보며 걷는다. 다른 때는 멀리서 적당히 바라보다가 오곤 했는데 오늘은 저길 꼭 지나쳐가야지. 타워팰리스 주민들이 켜둔 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남들이 선망하는 곳에 산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한때는 내가 저런 빛 속에 들어가 있는, 그 빛의 일원이었다. 또 남들이 선망하는 건물에서 일해본 적도 있었다. 취준생 시절에 그런 건물 앞을 지나다닐 땐 저 높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일까? 하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막상 그 건물에 들어가서 일해보니 딱히 즐겁지는 않았는데 그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어쨌든 그랬었다.
지금은 그 불빛 밖에 서있다. 여전히 그 불빛을 그리워하는 걸까. 오히려 갖고 있을 때에는 소중히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타워팰리스를 지나쳐 한참을 더 걷는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갈 시간.
나는 괜찮은 것인가? 나의 미숙함이 팀원들 전체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팀장 된 지 두 달째 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