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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Mar 30. 2024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를 읽고 (상)

정말로 오랜만에, 여행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한 때는 '여행'을 가거나 '여행기'를 쓰는 것이 특권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이제는 과거가 된 지 오래다.


      2023년 현재,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해외여행 또한 손쉽게 가는 시대가 되었으며 누구나 자신의 여행의 감상을 담은 글을 올리거나 영상을 올리는 등 여행기를 쓸 수 있다. 블로그에 올린 글로 여행작가로 전업하기도 하고, 백수가 되어 떠난 여행으로 100만 구독자를 거느린 프로 유튜버가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1930년대는 어땠을까?



     남자도 여행 다니기 어려운데 여자가 여행을 간다? 어렵지.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동안 나혜석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있던데 반해 후미코라는 사람에 대해선 전혀 몰랐지만 그 당시의 여행기라고 하니까 궁금해져서 빌렸다. 


     여행기는 느리게 진행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동하는 시간 자체도 하나의 여정이라 부를 만큼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코로나도 그렇고 그 사이에 나이도 먹어서 그런지 요새 여행에 대해 좀 심드렁한 마음이 들어서 '이제 여행이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이 책을 보고 나니 여행에 대한 의지가 다시 샘솟기 시작했다.



기차를 타고, 
천천히 하는 여행을 하고 싶다.



     1930년대에는 여행을 간다는 게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웠을지언정 기차를 타면 북한 지역을 지나서 중국으로 넘어가서는 몽골과 러시아를 지나 유럽으로 갈 수 있었는데!!! 그리고 그게 너무나 당연한 루트였다.


     지금은 비행기만 타면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북한과 통일되기 전까지는 100년 전과 같은 루트로는 절대 여행이 불가능하다. 여행 가기 어려운 시절에 살았던 그들이 너무나 부럽게 느껴짐과 동시에 내가 다음 여행을 하게 된다면 가능하면 기차를 타고 천천히 하는 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여기서 급발진해서 퇴사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해외로 기차여행 떠날까? 하는 망상까지 했지만 그 생각은 멈췄다.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 나오는 것과 같은 논리를 들이대보자면 내가 직접 해외로 기차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한 달에 한 번씩 가상의 여행계획을 짜는 것 또한 여행의 한 형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만간 브런치에 여행(계획만으로 이루어진)기를 연재해볼까 한다.


     여행은,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고 계획을 짜는 것부터 여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여행(계획)기를 올리다 보면 언젠가는 현실에서 진짜로, 그 코스대로 여행을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소비에트 러시아행>


여행을 떠나기 전

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즉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실로 알기 어려운 문제다. 더욱이 나의 견문과 학식, 나의 경험으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돌연히 동경하고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회화계를 동경했고 유럽과 미국 여자의 활동을 보고 싶었고 그들의 생활을 맛보고 싶었다. 19페이지

그 시대에도 지금도 여전히 고민은 비슷하구나.


스위스는 큰 나라 사이에 있어 정치상으로나 군사상으로 과히 할 일이 없으니 하늘의 은혜를 입은 자연 경색을 이용한 돈이 수입의 대부분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강원도 일대를 세계적 피서지로 만들 필요가 절실하다. 동양인은 물론 동양에 있는 즉 상하이, 베이징, 톈진 등지에 사는 서양인을 끌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매년 거액을 들여 스위스로 피서를 간다. 강원도에는 삼방약수가 있고 석왕사가 있고 명사십리해수욕장이 있으며 내금강과 외금강 명승지가 있다. 이렇게 구비한 곳은 세계에 없을 것이다. 49페이지

강원도를 밀 생각을 하다니. 그나저나 저기 나오는 삼방약수, 석왕사, 명사십리해수욕장과 내금강과 외금강 모두 북한 지역에 위치한 곳이라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게 너무 슬플 뿐이다.


<꽃의 파리행>

도로 설비

파리는 에투알개선문을 중심으로 별과 같이 길이 뻗쳐 있다. 그리고 건물이 삼각형으로 되어 자못 아름답다. 길모퉁이 집 벽에는 반드시 동네 지명이 쓰여 있어 길 찾기는 쉬우나 누구나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방향이 전혀 달라진다. 어디를 가든지 도롯가에는 가로수가 자라고, 중앙은 차도로 목침만 한 나무가 모양 있게 깔려 있고 그 좌우에 인도가 자리한다. 55-56페이지

에펠탑

전부 동으로 만든 탑으로 에펠이란 사람이 설계하여 그 이름을 취했다. 1900년 만국박람회 때 세웠으며 높이 300미터로 세계 제일가는 탑이다. 엘리베이터로 올라가 보면 파리 전경이 회색으로 보이고 센강이 가는 띠와 같고 파리 808개 거리가 다 보인다. 아래는 일대가 공원이며 파리 어느 곳에서든 이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59페이지

* 파리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이 설명을 보고도 지금의 풍경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하이드파크

런던 중앙에서 조금 서북쪽에 있다. 버킹엄궁전 부근 광장에 연속한 그린파크와 피커딜리가를 걸쳐 붙어 있고, 반대 방향으로 켄싱턴가든과 이어진다. 자작나무, 떡갈나무, 느티나무 등이 많고 그 아래는 전부 잔디여서 남녀 청년들이 서로 끼고 드러누운 전경이 마치 누에 잠자는 것 같다. 오가는 사람은 별로 놀라는 일도 없이 너는 너요, 나는 나라는 태도로 지나가고 만다. 70페이지

명물은 자욱하게 낀 짙은 안개이니 한낮에도 캄캄해 전차 통행이 정지된다고 한다. 75페이지


피카딜리서커스와 채링크로스

내셔널갤러리 앞에는 영웅 넬슨 동상이 하늘 높이 서 있으며 광장 좌우에는 해군성, 외무성, 내무성, 인도성, 상공무성, 육군성, 대장성, 농업국, 수산국, 지방정무국이 있다. (중략) 옥스퍼드 거리가 유일한 광장이며 건물은 모두 매연으로 고색창연하다. (중략)

하이드파크에 갔었을 때 기억이 난다. 잔디에 돗자리 깔고 자유롭게 뒹구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고 오가는 사람도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


템스강은 맑은 물이라 예상했는데 탁류, 흑색 물에 놀랐다. 
내가 런던에 체류할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여선생 한 명을 정했다. 방금 예순 살 된 처녀로 어느 소학교 교사요, 독신생활을 해가는 가장 원기 있는 좋은 할머니였다. 팽크허스트여사 참정권운동자연명 회원이요, 당시 시위운동 때 간부였다. 지금도 여자의 권리 주장이 나오면 열심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는 좋은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조절하여 은행에 저금을 하라. 이는 여자의 권리를 찾는 제1조가 된다." 
나는 이 말이 늘 잊히지 않는다. 영국 여자들의 선각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75-76페이지

* 조선에 살다가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선각자라고 인정이라도 하면 다행이지, 완전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양 예술과 나체미>

네덜란드는 볼록감이 없고 오목감이 있다. 평탄한 들판을 질주할 때 물 냄새가 나고 지면이 낮아진다. 강이라 하면 흐르는 물이 없고 호수라 할진대 주위에 산이 보이지 않고 바다도 아니나 사방에 산이 보인다. 풍차는 고색창연한 것, 신선한 것이 있어 아무리 보아도 염증이 아니 난다. 78페이지

* 네덜란드는 지면보다 해수면이 높은 나라인데 이걸 볼록감이 없고 오목감이 있다는 말로 표현하다니 머리를 탁 맞은 기분.


헤이그

헤이그는 네덜란드 수도이거니와 조선 사람으로는 잊지 못할 기억을 가진 만국평화회의가 있던 곳이다.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한 이준 씨가 당회 석상에서 분에 못 이겨 돌아가신 곳이다. 이상한 고동이 생기며 그의 외로운 넋이 우리를 만나 눈물을 머금은 것 같았다. 그의 산소를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어 찾지 못하고 다만 경성에 계신 그의 부인과 딸에게 그림엽서를 기념으로 보냈을 뿐이다. 80-81페이지

* 내가 해외에서 우리나라와 관련 있는 유적지를 방문했을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다. 네덜란드에 여행 간 적이 있는데, 일정 상 헤이그까지 가보진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있다.


카페

파리 시내에는 한 집 건너 카페가 있다. 피곤한 몸을 쉬일 때나 머리를 쉬일 때 들어가 차 한 잔을 따라놓고 반나절이라도 소일하거나 혹은 밀회 장소로 이용하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혹은 친구와 이야기하는 사교 기관처럼 되어있다. 85페이지


백화점

백화점은 곳곳에 무수하나 가장 유명한 것은 마가장루브르, 갤러리라파예트, 프랭탕, 봉마르셰로 저마다 특색을 갖고 있다. 파리인은 경쾌하고 기민하며 코즈모폴리턴이다. 여름철에는 피서 가는 사람 혹은 덧문을 닫고 향수를 뿌리고 소설이나 보다가 낮잠 자는 사람도 있다. 87페이지

* 100년 뒤 한국에서도 카페문화가 똑같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라파예트, 봉막쉐 아직도 있는 백화점이라 너무 신기하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다시 파리 도착

기차 안에는 스페인 사람이 많았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몰랐다. 스페인 사람은 보통 말이 많단다. 97페이지

* 스페인 사람들 말 많은 거는 종특인 듯ㅋㅋㅋㅋㅋㅋ 100년 전과 변함이 없구나 진짜 ㅋㅋㅋ 


뉴욕

뉴욕은 인구가 900만 명 되는 세계 제일 대도시인 동시에 세 사람 앞에 자동차 한 대씩 있다는 자동차 많기로도 세계 제일이요, 집 높기로도 세계 제일이다. 세계 제일 되는 것이 무수하며 세계 제일 되는 것을 자랑하는 곳이다. 도로는 남북과 동서로 나뉘어 걷기가 매우 쉬우며 좌우에 수십 층 집이 있어 하늘을 직면으로밖에 볼 수 없다. 100페이지


옛 대한제국공사관

세상은 좁고 사람은 가깝다. 여기저기서 친한 친구를 만나게 된다. 한소제 씨 부부, 우리 부부, 김도연 씨 이렇게 우리 일행은 한소제 씨 댁 자가용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가다가 멈추고 가리키는 집은 옛 대한제국 시대 주미공사관이었다. 조그마한 양옥 정문 위에는 국가를 표시하는 태극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상하게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103-104페이지

* 그나저나 뉴욕은 100년 전부터 세계 제일이었네. 그 당시 조선의 수준을 생각하면 진짜 하늘과 땅차이인데 그래도 지금은 많이 따라잡았다.


2일간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는 항상 따뜻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오렌지 밭, 채소 시장, 꽃 시장 등이 유명하다. 또 미국 동부인들의 피서지다. 일본 오사카와 같이 사방에 유람지가 많아서 어디든지 전차로 갈 수 있고 수많은 해수욕장이 있다. 113페이지
하와이 호놀룰루

하와이 군도는 마치 연극 중에 나타나는 중막과 같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승선한 지 일주일 만에 육지 즉 사시사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하와이에 기항하는 호감은 일생을 두고 잊기 어려울 것 같다. 하와이는 미국 영지지만, 동양인이 많고 더욱 우리 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119페이지

*개인적으로 작년에 하와이를 다녀왔고 LA에 다녀온 지는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다. 그래서 책 속의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발을 밟아본 장소이기에 와닿았다는 것 그리고 동생이 LA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열심히 일하고 있기에 저 '동포'라는 단어의 의미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를 읽고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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