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문장에 이어 하야시 후미코의 유럽 여행기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를 읽고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삼등여행기>, 햐아시 후미코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겠구나 싶어 우연히 스쳐 가는 이 친절한 사람을 적어도 눈으로라도 배웅하자는 마음에 악수한 뒤 곧장 커튼 사이로 플랫폼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엿봤다. 파리에 오기까지 아니, 온 뒤에도 나는 친절한 사람을 수없이 지나쳐 왔다. 미처 어떠한 보답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서로가 서로를 잊어버릴까. 155페이지
"여행은 길동무, 세상은 정"이란 말이 참 그럴싸하다고 새삼 감탄한다. 159페이지
* 나도 여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갔겠지.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
깨어 있어도 자고 있어도 꿈뿐, 평생 그렇게 꿈을 많이 꾼 적은 두 번 다시없다. 정말이지 아련한 꿈의 연속이었다. 160페이지
* 시베리아 열차 탑승기 중 한 구절인데, 언젠가는 꼭 한번 타보고 싶은 열차.
시베리아의 추위는 어딘가 정열적이다. 열차가 멈춰 설 때마다 얼레짓가루처럼 비걱비걱한 눈을 밟고 어슬렁어슬렁 둘러보니 다들 모피 안감을 댄 외투를 입고 발에는 양털로 짠 두툼한 방모로 만든 장화를 신고 있다. 쇠막대기에 손끝이 잠깐 닿기만 해도 아픔이 느껴진다. 오래 잡고 있으면 손이 얼어붙는다고 보이가 알려준다.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즐거움이자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뜨거운 물을 각 역에서 거저 얻은 일이다. 162페이지
프롤레타리아의 나라이니 어쩔 수 없는 걸까. 짧은 기간에 넓은 러시아를 알려고 하는 일이 너무 뻔뻔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삼등 열차 내에서 본 온갖 인정은 러시아 한구석을 알기에 충분하다. 체호프 소설에 나오는 각 계급의 평범한 인물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172페이지
* 안톤 체호프 소설 참 재밌다. 분량이 짧은 소설도 많아서 읽기 좋다.
언어가 통하지 않은 탓일까,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왜냐하면 내 눈에 들어온 러시아는 일본에서 알던 러시아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산자들이 연모하는 러시아가 이런 곳이었던가! 일본의 노동자 농민은 도대체 러시아의 무엇을 동경하는 걸까? 그럼에도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는 변함없이 프롤레타리아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죄다 특권자는 역시 특권자다. 174페이지
* 언젠가는 러시아 여행을 해봐야지. 그러고 보니 짧지만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해 본 적이 있으니 엄밀히는 러시아에 여행으로 가 본 적은 있지만 그것 말고 러시아 국토 전체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가 정확하겠다.
오랫동안 시베리아를 횡단한 탓인지 뭐든지 아름답게 보이는 파리 거리는 흡사 꿈속 같았다. 떫은 나무 열매나 뼈 많은 수프, 버터 바른 검은 비스킷 따위를 나눠주던 러시아인의 인정이 사뭇 그립고 더욱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라는 불안한 마음마저 있었기에 싸구려 호텔에 들자마자 열흘가량 돌인 양 가만히 잠만 잤다. 나는 자면서 어렴풋이 생각했다. 언제나 진실한 것은 파묻혀 지나가고 다소 연극적인 것이, 으스대는 것이, 상스럽게 비하하는 자들이 어이없게도 어느 나라든 특권을 갖는구나. 프롤레타리아라는 하이칼라 언어를 쓰지 않아도 기나긴 삼등 열차 여행에서 굉장히 착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봤다. 182페이지
* 러시아를 여행하다가 파리에 내리면 확실히 이질적인 기분이 들 것 같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짧게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길거리에서 보이는 키릴 문자가 참 낯설었고 표정이 없는 러시아 사람들을 닮은 거리도 유럽과는 다른 느낌이긴 했다.
길거리 연주자가 오면 다들 창문에서 내려다본다. 창 하나가 한 집이라서 저마다 창문에서 다른 인종이 내비치는 풍경은 자못 흥미롭다. 191페이지
지금은 걷는 일이 제일 행복하고, 걷는 것 외에는 안정감을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교외에서 그럴싸하게 살고 있다는 기분도 들지 않으니, 하루빨리 불우한 살림살이에 적응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192페이지
어째서 파리에 왔을까? 아가씨나 학생 같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구나 싶은데. 어느 인종이 프랑스 파리를 지탱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소수의 지식계급이라고 하지만 흥, 놀라운 이야기다. 프랑스를 지탱하는 건 백성과 이방인이다. 194페이지
* '저마다 창문에서 다른 인종이 내비치는 풍경' 그리고 '프랑스를 지탱하는 건 백성과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지금도 유효한 표현이어서 작가의 관찰력에 감탄했다.
나는 방에 달린 전등 불빛이 어두워 일할 때면 대개 카페에 갔다. 이상하게도 일본에 비해 소음이 신경 쓰이지 않는 데다 카페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모습이 자연스러운 일상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206페이지
유럽을 통틀어 파리는 가장 자유로운 나라이자 시골내기가 기뻐할만한 거리다. 이 자유로운 거리에 여덟 달 남짓 살았지만 일본에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어가 서툴렀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파리에 대해 쓰는 글도 결국 서툰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207페이지
* 나혜석도 카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는데 역시나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지금 현대에 우리가 카페를 이용하고 있는 모습이 이미 100년 전부터 존재했다니. 그리고 파리에 8개월이나 체류했고 그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만 그래도 서툴다는, 재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좋다.
일본에서 레스토랑을 여전히 사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동안에는 가정주부가 부엌에서 해방되는 일은 아주 먼 이야기겠지. 잠시 유럽에 살다 돌아오고 나서야 깨닫고 놀란 것은, 주변 여인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엌에서 줄곧 일한다는 사실이다. 210페이지
이런 파리 주부들이 나는 정말 부러웠다. 부엌이란 곳을 상당히 사무적으로 여기기에 이처럼 간편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겠지. 일본 부엌은 접시가 몇 장이니 밥상이 몇 개니 하며 쓸데없이 너무 잘고 번거롭다. 일본 주부가 부엌에서 해방되는 날은 언제쯤일까? 211페이지
"내 꿈은 스스로 일해 번 돈으로 당신의 나라에 가보는 거야." 이것이 열일곱 살의 꿈으로 내가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문명이 이토록 우리 젊은이들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213-214페이지
* 부엌이란 곳을 사무적으로 여긴다니, 너무 재밌는 비유다. 그리고 당시 결혼에 대한 젊은 프랑스 친구의 생각 또한 흥미롭다.
꽃이 이렇게 세력을 넓혀 나가니 거리는 꽃향기로 넘쳐흐른다. 나도 혼자 걸을 때 쓸쓸하다 싶으면 이 꽃을 사서 가슴에 꽂고 산책을 즐겼다. 파리는 화초가 많은 거리, 여자도 남자도 화초를 사랑하는 마음에 익숙하다. 215페이지
프랑스인들은 일요일과 축제일을 태양처럼 반가워하는 국민이다. 일요일이면 생선 가게도 정육점도 채소 가게도 오전 중에는 모두 문을 닫는 탓에 처음 갔을 땐 잠깐 불편한 곳이라고 느꼈지만 익숙해지니 그 규칙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217페이지
* 옛날부터 일요일에는 다 문을 닫았구나. 역시 근로자의 권리주장을 제일 잘하는 프랑스 답다.
오늘은 바람이 세다. 나는 감기에 걸려 누워 있다. 여기는 오 층이다. 창밖에는 파란 하늘과 구름뿐이다. 저 구름은 일본에서 온 걸까. 당분간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며 네모난 푸른 창문이나 보고 파리 거리 소리나 들어야겠다. 실은 너무 슬퍼 머릿속이 뭔가 생각할 일로 가득하다. 248페이지
* 나는 여행 다닐 때 아픈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를 여행할 때, 처음으로 감기에 걸려서(그럴만했던 게 전날 비를 흠뻑 맞았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를 공쳤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때 침대에 누워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프랑스나 독일 같이 유명한 나라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말도 안 통하는 라트비아라는 나라를 굳이 꾸역꾸역 찾아와서는 왜 비를 맞고 감기에 걸려서는 어질어질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가. 서럽고 슬펐던 것 같다.
그 수많은 사랑 속에 끼여 덩그러니 식사하는 나, 이런 고요한 기분은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하리라. 256페이지
* 이 문장을 보니 비엔나 외곽 지역에 와인이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저녁 먹으러 식당에 갔더니 나만 나 혼자였다. 그리고 뭐 또 유명한 펍이래서 갔더니 거기도 나 혼자. 그래서 술 취하고 외로워져 가지구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로 드라마처럼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길래 '안 되겠다, 이대로 술 마시면 위험하겠다' 싶어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숙소로 돌아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반가운 도쿄 거리, 마침내 일본에 귀환했다! 너무 기뻐 어찌할 줄 모르겠다. 1년 동안 나는 파리에서, 런던에서, 바르비종에서 구두 네 켤레를 신고 버렸다. 지금은 마르세유 태생의 하얀 해변 신발이 발을 감싸고 있다. 이런 싸구려 신발까지 일본으로 건너오고 말았지만, 먼 여행을 했다고 해서 하얀 해변 신발에 따로 엄청난 모놀로그가 있진 않다. 다만 이 신발 녀석은 내가 해온 일을 전부 알고 있는 데다 "음, 저쪽에서의 수확은 말이야"라고 말하며 우스꽝스럽게 꺼내놓기에 그야말로 제격인 물건이다. 아, 근데 이 파리를 향한 연모의 정은 어찌 된 걸까? 유독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고, 별로 돈을 실컷 쓴 것도 아니건만 파리는 참 좋았다. 270-271페이지
* 여행을 다니는 동안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다 짊어지고 다닐 수 없기에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다니게 된다. 그러다 보면 물건을 다 써서 버리거나 이동 중에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 내 곁에 남은 물건이라면 무생물일지언정 여행 내내 나와 힘든 여정을 함께 했던 것들이기에 애정이 샘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