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언어로 고마움을 표현하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대체로 그 공부의 목표는 바로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엔 이 대학교라는 미지의 장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어떤 공부를 할까? 도대체 어떤 생활을 하길래 어른들은 대학교만 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마냥 말하는 것일까? 나나 내 또래가 생각했던 대학생활이란 시트콤 논스톱에서 그려진 이미지가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텔레비전 속의 그들은 공부하는 모습보다는 재밌게 놀고 연애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대학교에 가면 공부는 안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앞으로의 꿈, 미래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야 했다. 그나마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가입하고 활동하면서 학교생활에 조금씩 정을 붙였고, 대학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아가고 있었는데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부모님도 이제 그만 놀고 진로를 정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좋아하던 동아리 활동도 그만두었다.
나의 첫 번째 꿈, 장래희망은 선생님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생각했던 꿈이었기 때문에 나는 모두들 당연히 꿈이 있다고 생각해서 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선생님이란 꿈을 가졌던 것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제일 많이 보는 게 선생님이어서 그랬던 거 같다. 나는 스스로는 이해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걸 남들에게 잘 설명해주는 타입은 아니라는 걸, 나보다 성적은 낮았지만 친구들에게는 이해가 되도록 설명을 잘해주는 내 친구를 보면서 깨달았다.
그러다 내가 외국어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나 한국어를 말하는 외국인들과 우리말로 이야기가 통하는 것처럼, 영어로 ‘Hello’라고 했을 때, 일본어로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라고 했을 때 외국인이 그 말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외국어를 사용하는 직업이 뭘까 하다가 막연하게 외교관이나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말을 조리 있게 하는 편도 아니었다. 협상 능력도 제로에 가깝고-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말을 해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편이어서 누군가를 설득시킨다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대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학생들이 주최하는 모의유엔대회에 가서 참관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꿈도 접었다. 그러고 나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고등학교 이후로 많은 선택지가 있지만 보통 남들이 가는 대학교라는 선택지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대학교 이후의 진로도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취업을 하게 된다. 나는 더 이상 공부를 하고 싶은 분야도 없었기 때문에 취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부모님 모두 사회생활을 오래 하셨다.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도 일을 했다. 지금보다 워킹맘이라는 개념이 더 희박했던 시절, 엄마가 계속 일을 했던 건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항상 씩씩했다. 당신이 돈을 조금이라도 버니 당신의 부모님께 용돈이라도 따로 드리고, 나와 동생에게 과자 하나라도, 옷 한 벌이라도 더 사줄 수 있어서 일하는 게 좋다고 하셨다. 집에만 있는 거보다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사회 돌아가는 것도 알고 그런 게 좋은 거라고 하시며 긍정적인 자세로 사회생활을 하셨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하는 엄마가 싫다기 보단 나도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기업을 다니며 사회생활의 쓴맛을 많이 본 부모님은 하고 싶은 게 딱히 없어 보이는 나에게 공무원을 적극 아니 강력 추천했다. 집에서 지원해줄 테니 일단 해보라고 했다. 나는 시험에 붙을 자신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여졌다. 언젠가 시험에 붙는다고 가정해도 만약 수험 기간이 길어지면 남들보다 사회생활을 늦게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감이 넘쳤는데 만약 1점 차이로 떨어진다면? 그렇게 나이만 먹는다면? 그때 일반 직장으로 다시 취업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공무원 사회의 딱딱한 분위기가 눈앞에 보였다. 돈이 달려있고 생계가 달려있다면 뭐라도 못하겠느냐만은 나에게 선택지가 있다면 70, 80년대의 고리타분한 분위기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당시에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엄마는 시험이라도 한번 봐보라며, 안 그래도 앞으로 몇 년간 공무원 많이 뽑을 거 같고 너는 경영학과 전공이니 조금만 공부하면 붙지 않겠냐고 부추겼다. 결국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공무원 시험 분위기가 어떤지 볼 겸 공부를 거의 하지 않은 채 세무 공무원 9급 시험을 보러 가기도 했다.
공무원 말고는 사기업에 입사하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니 일반 인문계열에 비해 취업하기는 수월해 보였다. 공무원도 공무원이지만 이게 안 될 수도 있으니 전공 학과와 관련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시 노동부에서는 기업과 아르바이트하고 싶은 학생을 연결시켜주는 직장체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었다. 집 근처 노동지청에 가서 신청을 하고 직장체험 참여기업 리스트를 받아왔다. 내가 직접 연락을 해서 그쪽과 조건이 맞으면 진행되었다. 업체 목록 중에 우리 구에 위치한 ㅇㅇ세무서가 있었고,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세무서에서 직장체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나까지 4명이 있었다. 그런데 나만 경영학과 학생이었고 전부다 관련 없는 과를 전공한 대학생들이었다. 직장체험 아르바이트는 오전 또는 오후만 근무할 수도 있었고 근무지가 세무서라도 해도 특정 학과 학생만 뽑는다던지 업무 경험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관련된 전공이 아니더라도 일을 할 수 있었다. 공공 기관답게 일은 어렵지 않았다. 주로 서류 정리, 현금영수증 소득공제용 플라스틱 실물 카드 포장 등의 간단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공무원 분들은 아르바이트생인 우리들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주셨다.
7월 초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7월 중순이 되었다. 재무/회계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아는 제1기 확정 부가가치세 신고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가세 제1기 확정 신고기한은 매년 7월 25일로, 책에서만 봤던 부가세 신고 현장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당시엔 부가세 전자신고가 도입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랬던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세무서에서 전자신고를 도와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세무서 민원 공간에 컴퓨터를 여러 대 쫙 깔아놓고 민원인들이 증빙과 서류를 가져오면 세무서 직원들이나 우리 같은 아르바이트 생들이 홈택스에 접속해 전자신고를 도와주는 식이었다.
나도 경영학 전공이라곤 하지만 세무회계 수업을 듣지 않은 상태여서 일반과세자와 간이과세자 구분, 부가세 신고는 언제 하는가 등과 같은 간단한 개념밖에 알지 못했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아르바이트 생들은 부가세 신고고 뭐고 아무것도 몰랐다. 대부분 영세업장을 운영하거나 간이과세자인 분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신고 내역이 복잡하다기보다는 컴퓨터를 못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오신 분위기라 우리는 정해진 자료를 입력해드리고 모르는 부분은 세무서 직원 분께서 와서 도와주시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대부분 세금이 없거나 적은 경우가 많았지만 전년도에 비해 세금이 많이 나왔거나 뭔가 본인이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생각한 민원인들은 우리에게 화를 냈다. 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제대로 가지고 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컴퓨터는 잘 다룰 줄 알지만 세금 신고, 납부에 대한 지식은 없으니 공무원 분들이 와서 무마해주고 신고 내용을 훑어주시며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런데 그중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민원인이 계신다. 그분은 처음부터 인사를 잘해주셨다. 부동산 임대를 하시는 분 같았는데, 필요한 서류도 깔끔하게 잘 챙겨 오시고 자료 입력에 필요한 보증금 이자도 알아서 계산해오셨다. 다른 사람들처럼 신고 내용이 복잡하지도 않고 서류도 잘 가져오셔서 신고는 쉽게 마무리되었고 고맙다고 해주셨다.
그런데 그게 평범한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얼마 전에 드라마 ‘쩐의 전쟁’에서 봤다고 하시면서 우리말로, 러시아 말로, 터키 말로 또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다른 몇 가지 언어로 '고맙다'라고 해주셨다. 이 분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민원을 도와드렸어도 그렇게 말을 해주실 분이었다. 나를 짜증 나게 했던 민원인들은 시간이 지나자 다 잊어버렸지만 이 분과의 에피소드만큼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작년 말, 나를 면접 때 뽑아주시고 한국법인이 설립될 때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던 사장님께서 퇴임을 발표하셨다. 솔직히 놀랐다. 요즘은 다들 오래 일하는 추세인 데다 은퇴한 우리 아빠보다도 젊으셨고, 최근 몇 년간은 매출이 횡보 상태이긴 했지만 그렇게 나쁜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사팀에서는 사장님 몰래 서프라이즈로 퇴임식 때 쓸 영상을 만든다며 직원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카메라 앞에서 30초 내로 짧게 한 마디씩 한 영상을 모아 퇴임식 때 튼다고 했다. 촬영할 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부끄럽고 잡음이 많이 들어갈 수 있으니 아예 작은 회의실을 영상 촬영 용도로 세팅해놓고 시간 될 때 알아서 촬영을 해놓으면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편집한다고 했다.
처음엔 영상을 찍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에겐 영상 공포증이라고 해야 할까, 영상에 찍힌 내 모습이 이상하고 보기 싫어서 가능하면 영상에 찍히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깨와 목이 비뚤어져 있고 얼굴도 뭔가 어색하고 내 목소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랬는데 영상을 찍는 사람이 아무래도 많이 없는지 공지 메일이 계속 왔고 우리 팀은 몇 년간 사장님과 점심을 함께 먹었기 때문에 은근히 모두 영상을 찍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와중에 나만 안 찍기는 좀 뭐해서 30초 내로 짧게 찍으면 된다고 했으니 10초만 찍어도 되는 거고,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을 하기로 했다.
영상에서 어떤 멘트를 할까 생각했다. ‘사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2의 인생 응원하겠습니다!’ 이런 멘트는 너도나도 할 것 같은 흔한 멘트였다. 그런 건 또 이상하게 싫었다. 그러다 생각이 잘 안 나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멘트를 하려고 하다 세계의 온갖 언어로 ‘고맙다’는 말을 들었던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사장님께 고마운 점이 많았지. 사장님 방문 바로 앞에 앉아 있었던 우리 팀은 거의 매일 사장님과 점심을 먹었다. 그래도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사장님께서 권위의식에 젖어있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편하게 여행 얘기나 사는 얘기를 했다. 여태껏 다닌 회사에서 ‘사장님’이라는 존재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정도,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할 일이 없는 존재 정도였다. 어떻게 감히 사장님이랑 일개 직원이 이야기를 나눠? 이런 느낌이랄까. 사장님과의 의사소통은 시무식, 종무식 같은 큰 행사에서 그들은 말하고 나는 듣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 사장님은 달랐고 앞으로 이런 사장님은 만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고마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을 찍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나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전하면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사장님!
지난 11년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Thank you! (영어)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일본어)
谢谢您。(중국어)
Merci beaucoup.
Danke schön! (독일어)
спаси́бо! (러시아어)
ขอบคุณค่ะ! (태국어)
감사합니다. (한국어)
바쁜 연초를 맞이했고 대망의 퇴임식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막상 전 직원이 모여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찍은 영상을 본다는 생각을 하니 민망했다. 그렇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식순에 따라 식은 진행되었고 드디어 깜짝 순서로 직원들이 준비한 영상이 시작되었다. 나보다 먼저 영상을 찍은 직원들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장치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영상이 시작될 때부터 살짝 버퍼링이 걸리더니 급기야 멘트 일부분은 들리지 않고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다. 사장님 몰래 준비한 영상이었는데 오류 때문에 껐다가 다시 틀기도 애매했는지 오류가 나는 상태로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다 내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그런데 그때가 렉의 절정이었나 보다. 화면에는 내 얼굴이 나왔지만 화면과 오디오 전체가 일시정지가 되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자 다음 사람으로 화면이 넘어갔고 내가 말했던 그 모든 고마움들은 나 그리고 영상 편집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말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