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의 기록 : 명동의 한 카페와 명동 CGV씨네라이브러리
<서울탐방 제13탄 : 명동을 거닐다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충무김밥 가게를 나와 나 혼자 명동의 시작점이라 부르는 명동역 앞 밀리오레로 향했다. '댄스짱'으로 유명했던 게 동대문 밀리오레였던가? 명동 밀리오레 입구에도 무대가 있어서 공연도 하고 그랬던 거 같은데 오랜만에 온 이곳은 아예 불이 꺼져있었다. 무대 자체도 철거돼서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의자들만 몇 개 놓여 있었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변한 거니.
밀리오레를 지나 나오는 바로 큰 사거리, 바로 여기가 보통 명동이라고 하면서 뉴스에 자료화면으로 많이 나오는 바로 그곳이다. 왼편에 있는 네이처리퍼블릭 자리가 서울인가 전국에서 제일 비싼 땅인가 그랬었는데 요즘에도 그런지 모르겠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명동이기에 온갖 로드샵 화장품 가게가 다 몰려있어서 만약 화장품 쇼핑을 기대하고 있다면 내국인이라도 명동에 오면 한방에 해결이다. 단, 외국인 취급받을 수 있으므로 주의.
명동의 가장 큰 대로를 시원시원하게 걷는다. 어제 오랜만에 연락온 친구가 낮에 덥다고 하던데 나는 요새 점심도 도시락 싸와서 사무실에서 먹으니까 출퇴근할 때 빼고는 낮에 밖을 나가지 않았더니 이 정도로 더워진 줄 몰랐다. 생각보다 꽤 더워서 겉옷을 벗었다.
큰길로 나오니 외국인들도 많이 보인다. 큰길을 걷고 있는데 왼편 골목길 사이로 파리 카페 어쩌고 이런 게 보인다. 프랑스어 학습자로서 길거리에서 프랑스어를 발견하거나 관련된 걸 보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기 때문에 길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간다.
가는 길에 <le jeudi>(목요일이란 뜻을 가진 프랑스어 단어)라는 이름을 가진 가게도 있다. <cafe de paris>는 외관부터 프랑스 느낌을 내려고 한 카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관광객들이 많은 곳에 있는 이런 카페는 겉모양과 달리 내부는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를 것임을 짐작하고 있으니까.
좁은 골목길이지만 여기도 사람들이 꽤 많다. 다시 이 길을 쭉 걸어 나가니 큰 길이 나온다. 왼편에는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보인다. 여기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도 있고 헝가리문화원도 있었다. 롯데백화점을 등지고 걸으면 앞쪽으로 가톨릭회관이 보인다. 몰랐는데 왼편에 국립극장이라는 간판이 달린 극장도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 가톨릭회관까지 쭉 따라가니 왼편에 YWCA에서 운영하는 page란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옆에 카페가 하나 있었다. 밖에서 슬쩍 보니 책들이 전시되어 있는 카페인데 내 기준에선 일단 책이 전시되어 있으면 북카페다. 이따 여기 들러야지.
카페에 들어가기 전 명동성당부터 보고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다. 오른편에 있는 명동대성당을 본다. 햇살이 강하다. 낮에 보는 성당과 저녁에 보는 성당은 느낌이 다르다. 계단을 올라가 구경해도 되지만 오늘은 날도 덥고 해서 아까 본 카페에 들어가 땀도 식히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어 성당 사진만 찍고 길 건너 카페로 이동했다.
카페 온드림 소사이어티(ondream society) 정보
* 위치 : 서울시 중구 명동11길 8-2 (YWCA page 건물 옆, 명동성당 건너편)
* 특징
- 카페이자 복합문화공간
- 현대자동차정몽구재단에서 운영
- 아주 조용한 분위기의 북카페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책들이 많이 놓여있어서 북카페로 분류
이곳은 현대차재단에서 운영하는 카페로 (나중에 찾아보니 복합문화공간으로, 공간 한편에서는 작게 전시회 같은 것도 한다고) 장애인들도 일하는 모양이다. 울산에서 본 지관서가와 비슷하다. 공간도 널찍했고 내가 사 먹는 커피 한 잔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니 뿌듯한 마음도 든다. 책이 많진 않지만 마침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해서 기분이 업됐다.
바깥이 잘 보이는 통창 앞에 앉았는데 통창이다 보니 햇빛이 비추니 뜨거웠다. 그래도 햇빛을 쬐고 싶어서 햇살이 드는 자리에 앉아 사진도 찍고 여행 에세이 한 권을 뚝딱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쩜 나랑 비슷한 사람이니 하며 폭풍공감. 작가는 내가 요즘 느끼는 불안감에 대해 비슷한 언어로 그 감정을 써놓은 사람이었다. 비슷한 누군가는 이렇게 책을 쓰며 작가로 살고 있고 누구는 십 년 넘게 직장을 다니고 있지요.
통유리로 된 카페에 앉아 있다 보니 카페 바깥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3시가 되어가니 하나둘 포장마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포장마차 리어카에 오늘 장사를 위해 박스 여러 개를 싣고 이동 중이었는데, 그중 딸기가 든 박스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로 계속 가고 있었다. 그랬더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박스 떨어졌다고 알려줘서 리어카 주인이 그걸 주으러 왔다.
그런데 거기가 차도 같이 다니는 골목이라 멈춰 선 리어카 뒤로 차들이 줄줄이 서있게 된 거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걸 재빨리 주워서 리어카를 빨리 비켜줘야 하는데 혼자 이걸 다 주으려니 양이 많아서 리어카 주인이 당황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자 그 근처에서 담배 피우던 젊은, 정말 시퍼렇게 어린애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다가와서 일사불란하게 상자를 주워줬다. 남 일에 무관심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게 내가 MZ세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못된 편견이구나 싶었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에세이를 후다닥 읽었고 남은 시간 동안 오늘 명동 구경에 대한 감상도 남겨둔다. 바로 남겨두지 않으면 기억이나 감정이 휘발되어 버리니까 뭐라도 적어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 보러 갈 시간이 다되었다. 오늘 내가 가려는 CGV 명동씨네라이브러리 지점은 아까 왔던 명동역 근처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걸어가야 한다.
오랜만에 왔더니 건물 입구를 못 찾아서 헤매고 있는데 내 앞에는 누가 봐도 외국인 관광객인 듯한 사람들이 얼쩡대고 있다. 안 갈 거면 좀 비켜주었으면 좋겠는데 기어이 내 앞으로 걸어간다. 혹시 나랑 목적지가 같은 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옷차림이나 외모를 보고 일본 사람 아닌가 했는데 말하는 거 들어보니 일본인이 맞았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그룹으로, 이 사람들도 영화를 보러 온 건가 싶었는데 건물 층 안내 표지판 중 성형외과를 가리키며 뭐라 뭐라 이야기를 나눈다. 엘리베이터가 두 개인데 거의 동시에 와서 따로 탔다. 괜히 성형강국이 아니라니깐.
영화를 잘 보고 상영관 밖으로 나왔다. 영화 끝난 직후 명동 거리로 나왔다면 아직 해가 안 떨어졌을 텐데 나는 영화의 감상에 취한 데다 온 김에 씨네라이브러리 구경도 좀 할 겸 바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행사가 없는 씨네라이브러리는 카페처럼 조용하고 사람도 나 빼고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남겨놓자 싶어서 핸드폰으로 브런치앱을 켜고 다다다다 하고 싶은 말들을 아무 필터도 거치지 않고 쏟아냈다.
그러고 밖으로 나왔더니 어느새 밤으로 변해있었다. 낮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아까는 길이 한가했는데 이제는 그 길 중간에 포장마차들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확실히 낮보다 거리가 흥겹다.
뭘 먹을까 거리 양쪽을 고갤 돌려보다가 호떡 발견. 아아, 호떡과 붕어빵. 길거리에서 요즘 참 만나기 어려운 겨울 군것질의 기본템이다. 배가 살짝 고프니 호떡을 먹기로 했다. 가격도 2천 원으로 상대적으로 다른 아이템에 비해 저렴하다. 맛있게 먹고 일단 급한 허기는 채웠다. 그러고 나니 다른 음식을 적극적으로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원래 여기서 아예 저녁을 먹으려고 일부러 현금도 챙겨 들고 왔는데 이상하게 더 이상 안 땡긴다.
나는 관광객 기분을 내고자 명동에 왔지만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한국사회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포장마차에 있는 음식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군것질 거리인 붕어빵, 호떡, 계란빵. 또 랍스터 꼬리 구이, 치즈구이, 타코야끼 등 한국적인 먹거리와는 상관없는 퓨전음식이어도 외국인들 입장에선 낯선 곳에 놀러 왔으니 전부 다 신기하게 보이고 특이하거나 맛있어 보이면 어차피 물가도 잘 모르니까 그냥 돈 주고 사 먹는 것이다. 그냥 그런 행동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밌는 거다.
하지만 나는 익히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로 걷는 거지 그들과 같은 여행객이 될 순 없었다. 단지 그들 옆에 서서 그들의 신남과 흥분과 낯섦을 느끼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흡수하고자 하는 내부인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명동에 와서 관광객 놀이를 하려고 해도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명동은 학창 시절에 친구들 손잡고 놀러 와서 당시 최신 유행하던 패션 아이템을 사러 다니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그 친구들과도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그저 과거의 추억 속에 남겨진 장소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여러 군데 화장품 가게를 한꺼번에 들러서 이것저것 편하게 살 수 있고 다양한 길거리 음식을 먹어볼 수 있는 또 서울의 전통적인 관광지-각종 궁궐, 박물관 등-와도 가까우면서 쇼핑하기 좋은 곳으로 남겠지.
내 손엔 아직 현금이 8천 원이나 남아있었지만 관광객들처럼 여기서 한 끼를 전부 해결하려는 생각은 과감히 그만두기로 했다. 아까 호떡 하나를 먹으면서 급한 허기를 꺼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얼른 집에 돌아가서 김치만두를 쪄서 밥이나 먹자,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