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의 기록 : 마스크를 벗고 거리를 걷고 충무김밥을 먹다
2023년 3월 어느 날의 이야기.
오후에 휴가를 내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나는 평상시 외국영화나 독립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 극장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골랐다면 그 시간에 서울 어디선가 그 영화가 상영하는 곳에 가서 봐야만 한다. 그런데 오늘 볼 영화는 상영관이 많은 편이다 보니 오히려 어디서 봐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럼...
어디로 가볼까?
모처럼 휴가를 냈는데 아무리 상영관이 많다고 해도 회사 근처엔 머물고 싶진 않다. 좀 멀리 가보자. CGV 앱을 뒤적거리다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오랜만에 명동에 가볼까?
명동에는 CGV가 두 개 있는데 그중에 명동씨네라이브러리 지점이 있다. 이곳은 영화관 시설 외에 지점 이름에 맞게 작은 도서관 공간이 함께 있다. 난 책을 좋아해서 책과 관련된 공간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좋아하는 데다 명동이면 집에 돌아가기도 가깝다. 여기로 가자. 그리고 이번 3월의 서울탐방을 아예 명동으로 하자. 땅땅땅.
몇 년 전, 저녁에 명동에서 영화를 보고 솔루션스의 <L.O.V.E>를 들으며 밤거리를 걸었던 기억, 그보다 더 오래전 중고등학교 시절에 명동으로 쇼핑 나왔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래서 명동에 관해서라면 뭐라도 쓸 수 있었다. 장소를 명동으로 정하고 나니 즉시 명동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유튜브만 조회해 봐도 당장 명동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기 시작했다는 영상이 자동추천되었다.
점심을 안 먹고 퇴근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한참을 달려 을지로입구역에 내렸다. 명동에 오기 위해선 지하철역 이름마저 직관적인 4호선 ‘명동역’에 내려도 되지만 2호선을 타고도 올 수 있다. 바로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 내려서 슬슬 걸으면 명동역과는 반대인 명동 거리 끝자락에 다다를 수 있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아서인지 근처 직장인들의 모습도 많이 보이고 곳곳에 외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띈다. 며칠 전부터 대중교통 내에서도 마스크 착용 제한이 풀렸다. 하지만 그동안 다들 마스크에 익숙해졌기도 했고 아직은 사람들 눈치도 보이는지 막상 벗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 조차도 대중교통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마스크를 하고 있다 보니 밖에 나왔는데도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야외를 한참 걸을 거니까 마스크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적어도 오늘 명동 거리를 돌아다닐 때만큼은.
마스크를 벗었다. 혹시나 마스크를 잊어버려도 괜찮다. 이제는 대중교통에서 안 써도 법적으로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마스크를 안 쓴 게 당연한 건데 오히려 안 쓰니까 어색하다. 그런데 마스크를 벗자마자 길거리에 놓인 쓰레기에서 풍겨오는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동안은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일상에 이런 냄새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거다.
본격적으로 명동 거리를 구경하기 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가 고팠던 나는 점심부터 먹고 움직이기로 했다. 명동은 아무래도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보니 혼밥 하기에 적당한 장소는 별로 없는 거 같다. 명동 하면 칼국수가 유명하긴 한데 적어도 명동칼국수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서 '명동 혼밥'이라고 검색하니 그중에 충무김밥이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충무김밥과 떡볶이 중에 뭘 먹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충무김밥 먹자.
학창 시절부터 돌아다닌 명동의 골목길 위치는 익숙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가게들은 전부 낯설었다. 걸어가면서도 이 길이 맞나 싶어 자꾸 양 옆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길은 아는 길인데 말이지. 거리를 걸어 금방 충무김밥집에 도착했다.
명동에서는 혼자 돌아다니면서 어버버 하면 외국인 관광객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화장품 가게에 들어가면 특히 더한데 종업원도 조선족만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가게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한다. 그렇다고 내가 서울의 다른 지역에 있는 가게에 들어갈 때 인사를 안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명동에서만큼은 더 크고 분명하게 인사를 하게 된다.
자리에 앉아서 가게를 슥 둘러봤는데 메뉴판이 안 보인다. 물론 충무김밥을 먹을 거지만 혹시 다른 메뉴는 뭐가 있나 궁금해서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식탁 위에 있는 태블릿 피씨로 주문하라고 한다. 뭐야, 몇 년 전 중국여행 갔을 때 태블릿 피씨로 주문하는 거 보고 신기해했는데 명동도 그렇게 됐구나. 사람 간의 정은 느끼기 어렵겠지만 이제 외국인들도 편하게 주문할 수 있고 인건비 절약도 되겠네.
주문한 지 3분도 아니 체감 상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뉴스에서만 보던 음식배달하는 로봇이 내 테이블 앞에 와서 멈춘다. 그러자 종업원은 로봇이 배달해 온 충무김밥 한 접시를 그대로 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이 무슨 기계와 사람의 콜라보람?
충무김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먹던 충무김밥이었는데 이제는 충무김밥을 먹을 때마다 숙언니의 충무김밥 라방이 떠오른다. 일명 충무꼰대로 유명해진 그 영상. (ㅋㅋㅋ) 차마 숙언니처럼 포크를 세 개는 못쓰겠고 포크 하나는 김밥을, 나머지 하나는 섞박지와 오징어를 번갈아가며 찍어먹기로 한다. 그런데 먹다 보니 묘하게 왜 이렇게 먹으라고 했는지 충무꼰대의 가르침에 납득했다. 섞박지와 오징어는 안 매웠는데 이상하게 먹다 보니까 매워져서 코를 훌쩍 풀고 국물을 홀짝홀짝 들이켜고 나중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충무김밥 한 접시를 깔끔하게 비우고 나왔다. 양이 많은 음식은 아니라 명동 길거리 음식을 추가로 먹어볼까 했는데 평일 낮이라 그런지 아직 포장마차들이 아직 거리에 나와있질 않았다. 관광객 기분 좀 내볼까 했는데 아쉽다.
<서울탐방 제13탄 : 명동을 거닐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