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령 테네리페 섬이 고향인 소녀의 이야기
이제 여행 날짜를 뒤에서 세는 게 빠르다. 리스본 여행 종료일 그리고 두 달간의 유럽여행 종료일로부터 D-3일. 그리고 오늘은 월요일이다.
그러니까 이번 주 금요일에는 서울에 도착해 있게 된다. 일주일의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일주일의 시작인 오늘이 더욱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토요일 저녁에 묵었던 숙소에서 이야기를 나눈, 테네리페 섬에 사는 스페인 친구는 오늘 체크아웃을 한다고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그날 나름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고새 정이 들었는지 오늘 아침에 쪽지라도 놔두고 올까 하다가 조용히 나왔다.
만약 내일이 체크아웃인데 쪽지를 발견하면 웃길 것 같아서. (하지만 이 친구의 체크아웃은 월요일이 맞았고 내가 숙소에 돌아오니 침대는 비워지고 없었다.) 그래서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내 마음속에만 메시지를 조용히 남겨두기로 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심리학을 공부한다는
테네리페 출신 소녀에게,
외모가 동양적이었다.
그래서 중국인인가? 말레이계인가?라고만 생각했다. 너는 내 위 침대에 누워 굉장히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정작 여기가 유럽이라 외모만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편견이란 무서운 것.
네가 말하는 언어가 무슨 말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분명 내가 아는 중국어는 아니었다.
보통 방에서 누군가 통화하는 소리는 듣기 좋지 않다. 잠깐 통화하는 건 모르겠지만 지속적으로 수다를 떠는 건, 그것이 설령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데 내가 잘 모르는 미지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와 그 언어는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내가 모르는 동남아계 언어인가? 나중에 너 무슨 언어 쓰는지 만큼은 꼭꼭 물어봐야지, 했다.
통화 끝나고 씻고 나온 네가 말의 물꼬를 터줬지. 그래서 혹시 무슨 언어 쓰냐고 물었더니 스페인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읭? 했는데 스페인어라도 쓰는 지역이 다르면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내주었다. 그리고 참 외모는, 핏줄은 중국계인데 중국어는 하나도 못하고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다고 한다.
스페인어가 이렇게 좋게 들리긴 첨이라며 호들갑을 떨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지. 그 외에는 여행자들이 하는 평범한 대화들. 리스본에는 며칠 있냐, 어디 가봤니, 다음엔 어디 갈 거니 등등.
너는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유럽 대학 간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포르투 위의 작은 도시 브라가에 1월부터 와 있다고 했고 심리학을 공부한다고 했다. 그런데 집이 그립다길래 '아니, 스페인이면 같은 이베리아 반도에 붙어있는데 버스 타고도 갈 수 있지 않아?' 했더니...
우리나라의 국토 정의(범위)는 아마 다음과 같을 거다 : 대한민국 한반도와 그 부속 토지(즉 섬 같은 것).
하지만 스페인이나 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본토 외에 해외 영토에 자국의 땅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녀의 고향은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스페인 령인 테네리페 섬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모로코 앞에 있는 섬이지만 그곳도 스페인인 셈이다. 그러니 그녀가 스페인 출신이라고 말한 것도 맞다. 그것까진 생각 못했네.
아무튼, 짧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 그리고 너의 그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던, 듣기 좋았던 스페인어는 잊지 못할 거야.
그 애가 영어를 할 때는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혹시 프랑스어도 한국어도 심지어 중국어까지도 단순히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하면 그것이 어느 언어든 괜찮게 들리는 걸까? 하는 의문이 갑자기 들었다. 단순한 폴리글랏, 다개국어 학습자의 궁금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