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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에어팟 한쪽이 고장 났다

왜 하필 내가 백수일 때 고장 나는 거니, 에어팟아...?

by 세니seny

2024년 어느 여름날, 한 여름밤의 산책길에서 일어난 일.


이다음으로 내 귓가에 흘러나올 노래는 누가 들어도 두근두근 하는 러브송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에어팟은 한쪽이 고장 난 상태. 이런 나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첫째, 그냥 고장 난 에어팟을 끼는 것. 적어도 소리가 나는 한쪽만이라도 끼는 것.

오른쪽은 잘 되는데 왼쪽은 아무리 충전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양쪽으로 들어야 될 것을 한쪽만 들으니 볼륨이 줄어들어서 평상시보다 소리를 더 키워야 한다. 그런 데다가 소리도 나지 않는 왼쪽 에어팟을 굳이 끼고 있을 필요도 없는데 끼고 있으니 귓구멍만 아프다. 새로 취직하게 된다면 에어팟부터 제일 먼저 사야지 벼르고 있다.


둘째, 예전에 아이폰을 살 때 들어 있었던 유선 이어폰을 사용하는 것.

그동안은 딱히 쓸 일이 없어 그냥 집에 놔뒀는데 이럴 때 요긴하게 쓰고 있다. 이동할 때 밖에서는 유선 이어폰 쓰다가 줄 꼬이고 복잡하고 신경 쓰이니 그냥 한쪽이 안 들려도 에어팟을 끼는 편이지만 운동할 때는 그저 걷기만 하고 또 음악 듣는 게 중요하므로 유선 이어폰을 쓰기로 한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 당첨.


노이즈 캔슬링이 될 턱이 없는 나의 유선 이어폰 너머로 야외의 소음이 고스란히 들린다. 이제 곧 가을이 다가옴을 알리는 듯한 소나기가 내린 직후라 그런지 이 시간대면 귀를 찢을 듯이 들려오던 매미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천변 다리 위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나 대화 등이 들려온다.


그렇게 러브송의 전주가 막 시작되려는 즈음이었다.

신나는 댄스음악이나 EDM이 아니고서야 보통 노래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는 그렇게 큰 볼륨의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작게 시작해서 점점 커지는 쪽이지. 그러니 노래 중간보다 노래가 시작할 때 야외의 소음이 더 잘 들린다.


이때 내 뒤쪽에서 분명 누군가 뛰어오는, 타닥 타닥 타닥 소리. 꽤 빠른 발걸음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온다. 그 발소리의 주인공은 나와 같은 방향을 향해 뛰고 있었으므로 나와 점점 가까워졌고 도플러 효과에 따라 그의 발소리는 점점 더 크게 나의 유선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바닥에 부딪혀 내는 그 타닥, 타닥, 타닥 소리는 마치 러브송이 시작되며 곧바로 반응한 내 심장 소리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겠지만 나는 꼭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 여름밤의 러너는 내 옆을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가 조금만 느리게 뛰었어도 나에게 이런 문장들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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