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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냉장고 일기

당신의 냉장고 안은 안녕하십니까

by 세니seny

토요일 밤이니까, 맥주를 한 캔 깠다.


요즘 맛있는 외국 맥주는 죄다 큰 사이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작은 사이즈가 더 좋다. 약간 부족한 듯 마시기 좋고 혹시 모자라면 한 캔을 더 마시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다란 큰 사이즈는 일단 따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끝까지 마셔야 한다. 그게 좀 불만이다. 편의점과 슈퍼에 각각 가봤지만 작은 사이즈는 국내산 맥주 밖에 없어서 그나마 국내산 맥주 중에 마실 만하다고 느끼는 테라를 골라 사 왔다.


흠, 역시 한 캔은 살짝 부족하단 말이야. 다시 냉장고로 가서 블루문을 따야 하나 아니면 테라를 두 캔 사 왔으니 나머지 한 캔을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 냉장고 안쪽을 보니 어라, 내가 안 먹는 소주병이 있네? 뭐지 이거? ‘새로’네.


최근 몇 년 사이 술에서도 제로 슈가 열풍이 불면서 엄청 유행하길래 궁금해서 사봤던 거 같은데 반 정도 겨우 먹고 아직도 냉장고에 살아남아 있었다. 병 겉면에 연월일 정보가 적혀 있는데 유통기한은 아닐 테고 제조일자겠지. 보니까 날짜가 작년 이맘때쯤 딱 이사 올 때니까 분명 이 소주는 여기에 이사 와서 산 것일 테다. 아, 제로 슈가 소주가 유행할 때가 그 때였었나.


독립한 지 햇수로는 4년 차가 된 나의 냉장고를 들여다본다. 물론 최근에 산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아주 가-끔 이사오기 전 집에서 샀던 것들이 발견되곤 한다. 오늘도 그중 하나를 해치웠다. 스파게티용 소스인데, 면을 따로 삶은 뒤 소스를 따로 데워서 면에 뿌리거나 후라이팬에 이미 삶아진 면을 얹은 뒤 거기에 소스를 붓고 데워서 먹는 것이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는 이유로 여태 먹지 않고 두고 있었다. 우리는 냉장고 안에 있으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냉장고여도 너-무 오래 있으면 썩거나 상하게 마련. 보니까 이것도 유통기한이 벌써 1년 이상 지나 있었다. 날짜로 봤을 때 분명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니라 이 전에 살던 집에서 사둔 것이겠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먹자. (다행히 먹고 배탈이 나진 않았다)


아무튼 여기 이사 와서 산 것이긴 하지만 반 병 정도 먹고 남겨둔 소주병을 발견해 버렸고 그렇다고 큰 맥주캔은 왠지 따기 싫은 요상한 마음. 그래, 먹다만 소주병이 눈에 띄었으니 이걸 좀 마셔볼까? 해서 1/4 정도를 머그컵에 따라 본다. 아참, 나 미국에서 사 온 소주잔도 있었는데 왜 머그컵에 따랐을까나. 그러다 보니 벌컥벌컥 마시게 되었고 금방 취기가 올라온다.


이상하게도 취기가 올라오니 외국어를 막 씨부리고 싶어졌다. 중국어든 프랑스어든 뭐든. 한국어를 제외한 어떤 외국어든 초보자인 현실의 나. 하지만 약간 취기가 도는 꿈 속에서의 나는 갑자기 초능력을 얻어서 무슨 언어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취기인 걸까.


한때는 기자였고 현재는 작가인 이나가키 에미코가 쓴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라는 책이 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해 전기 공급이 끊기는 걸 느끼고 나서 전기를 적게 써보자고 생활의 변화를 주게 된다. 처음엔 난방기구, 밥솥 이런 것들로부터 독립해서(=버렸다는 뜻) 결국 냉장고까지 버리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의 말대로 예전에는 냉장고 없이도 잘만 살아왔다. 일본의 에도시대도,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도. 지금은 오히려 냉장고 때문에 당장 먹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마구 사다 두고 쟁여두다 결국 버리게 되는 것 또한 수두룩하다는 것. 다들 알고 있지만 불편한 진실. 배가 고파서 굶는 것보다 배가 터져서 음식이 남아도는 것이다.


나도 이번 겨울은 본의 아니게 난방기구와 난방으로부터 독립하려고 노력 중이라 책을 읽으며 그녀에게 꽤 공감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녀처럼 냉장고는 놓지 못하겠다. 냉장고 안에 오래된 스파게티 소스와 소주병 외에 또 오래된 무언가가 들어있으려나? 그녀처럼은 못하더라도 내년에 다른 집으로 이사 갔을 때 너무 오래된 것들을 발견하지 않도록 냉장고 정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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