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소화기와 10년 뒤의 나는 무슨 관계?
2024년 8월 21일의 일기.
저녁 수영이 끝나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 앉아 멍 때리며 오다가 거의 내릴 때가 다 되어서였다. 하차벨을 누르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다 문득 내가 앉은자리 바로 앞에 놓인 빨간색 휴대용 소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버스에는 소화기가 여기 놓여 있구나. 그런데 원래 버스에도 소화기가 있었나? 최근에서야 새로 생긴 건가? 뭔가 법이 개정됐다던지 해서? 그건 모르겠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동생이 부엌에서 요리한답시고 가스레인지로 뭘 하다가 불을 낼 뻔한 적이 있었다. 당황한 동생은 그 상황에서도 현관문 앞 엘리베이터 옆에 있던 소화전을 떠올리고는 소화전 문을 열어 휴대용 소화기를 꺼내러 갔다. 소화기를 한 번도 써본 적도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었지만 어찌어찌하여 소화기를 작동시킨 모양이었다.
나도 그저 본 거라고는 뉴스 자료화면에서 소방대원들이 긴 호스를 들고 화재현장에 휘두르는 모습뿐이었으니 당연히 소화기를 작동시키면 물 같은 게 나올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소화기에서 나온 건 마치 라면 수프가루 같은 고운 하얀색 가루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엄마가 마주한 부엌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나갔던 부엌엔 시커멓게 그을린 냄비와 부엌 여기저기에 온갖 하얀 가루가 튀어 있는 모습. 나는 이미 상황이 다 종료된 다음 밤에 집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 모든 건 엄마의 말로만 전해 들었지만 묘사력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은 엄마가 하는 말은 대체로 맞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눈앞에 보였다.
그래서 휴대용 소화기에 대한 기억이 특별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눈에 띄는 문구.
사용연한 : 2034년 04월
지금으로부터 10년 뒤다.
10년 전의 나 그러니까 2014년의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물론 그때와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직장인 생활을 하고 있고 그것도 그렇게 탈출을 원하던 회계 업무를 아직까지 했으며 (물론 올해 초에 관두어서 이거 하나는 깨졌지만) 여전히 혼자다.
하지만 2014년과 다른 점 하나라고 한다면 그때는 아직 우리 집 막내였던 강아지인 똘똘이가 살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또 달라진 점 하나는 그때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엿한 독립 4년 차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는 2034년이다. 그때의 나는 40대 후반이 되었겠지. 그때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 살아는 있으려나? (ㅎㅎ)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아차, 나 내려야지' 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